태풍 「어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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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태풍「어빙」이 지금 시속20km의 속도로 목포쪽으로부터 북상하고 있다.
태풍을 옛날 중국사람들은 기풍이라고 했다 .
구 또는 구와 풍자를 합친 글자다. 『모든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 또는 『사방에서 부는 바람』이란 뜻이다.
바람의 전조가 되는 천기현상을 중국에선 풍태라 했다.
이때의 태가 어느 사이엔가 태풍이란 글자로 바꾸어졌다.
다만 남해쪽에서 발생하여 여름에서 가을사이 일본과 한반도 또는 중국의 남안에 엄습하는 열대성 저기압, 그중에서도 특히 최대 풍속이 매초 17m이상되는 것을 태풍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미처 1백년도 안되는 모양이다.
태풍에 이름이 붙기 시작한 것도 2차대전후부터였다. 모두 여자이름들이었다.
지난해에 미국서 여권운동자들이 맹렬히 이를 공격했다. 끔찍한 재해를 동반하기 쉬운 태풍에 왜 하필이면 여자이름을 붙이느냐고.
아무리 사나운 태풍도 여자이름이 붙으면 부드러워질까해서였다고 기상당국자들은 궁색한 변명을 해왔지만 끝내 굽히고 말았다. 「어빙」10호는 우리가 처음으로 맞는 남성태풍이다. 이름값을 얼마나 톡톡히 하려는지 걱정스럽다.
공군이 보는 예상진로는 서해를 거쳐 서울 북부지방을 통과하여 강릉으로 빠져 나가리라 한다.
이렇게만 된다면 지난번의 폭우로 혼이난지 얼마되지도 않은 서울·경기지방이 또 한번 결딴날게 를림이 없다.
관상대쪽 예상으로는 「어빙」호는 육지에는 으르지 않고 서해에서 바로 평양북쪽으로 빠져나간다.
그런다해도 마음은 놓이지 않는다. 이번 태풍 강도는 B급이라지만 세력반경은 5백km나 되는 초대형.
그만하면 지난59년에 중부지방을 박살냈던 「사라」호와 버금갈만큼 사나운 것이다.
태풍이 무서운 것온 반드시 폭우가 뒤따르기 때문이기도하다. 이미 제주지방의 감귤밭들이 결딴났다. 올 겨울의 귤값은 엄청나게 비싸질 것이다. 부산에서도 3명이 실종되고 도로들이 물에 쓸려나갔다.
17상오 10시 현재 서울의 하늘에선 가는비가 내릴뿐 이상하도륵 조용하다. 문자그대로 태풍을 앞둔 고요랄까.
태풍을 만날때마다 우리는 새삼 인간의 무력함을 느낀다. 혹은 오만한 인간을 응징하기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태풍은 왜·언제·어디서 일어나는지를 예측할수가 없다.
그게 꼭 여자의 마음과 같다는 생각에서 당초에 태풍에 여자이름을 붙인 것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저 변덕스런 남성처럼 「어빙」이 진로를 바꿨으면 할뿐이다. 아니면 잔뜩 기가 죽은 요새 남성처럼 꼬리를 살짝 감춰버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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