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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9)<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불교근세백년 -강석주|조선불교총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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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신회원들은 조선불교총회를 계기로 일거에 강력한 통일기관인 총무원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30본산 대부분의 주지들은 총무원이 총독부의 인가를 받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므로 차차 충독부의 양해를 얻어 설립하기로 하고 우선은 1922년도 사업을 의논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신회원들은 총독부 때문에 개혁안이 즉시 실현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선불교총회의 첫째 목적이 제도개혁에 있는 만큼 그 문제에 대한 대략의 방침이라도 결정한 다음에 새 사업을 토의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때 30본산 주지회의 의장이며 종무원 원장인 홍포룡 스님(월정사)은 본산주지를 대표하여 『이 회의는 유신회가 주장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개최한 것이 아니다. 30본산 주지와 불교청년 사이에 의견을 교환하여 사업을 진행하고자 연 것이다.
그러므로 사업만을 협의 할 것이지 제도의 개혁은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30본산 주지와 유신회원이 합동한 조선불교총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30본산 연합제규에 의한 본산주지회의만이 유력하고 불교총회는 한 때의 자문역할을 할뿐이라는 것이었다.
본산주지의 전횡을 막기 위해 제도를 개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유신회원들은 30본산 주지회의를 조선불교총회로 바꾼 회의에서 그들의 뜻이 이제 이루어진다고 기뻐한 것도 잠깐, 대다수 본산주지들의 반대에 부닥친 그들의 분노와 실망과 반발은 거셀 밖에 없었다. 회의장은 수라장이 되어 도저히 회의를 진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통도사 주지 김구하 스님은 『청년들의 뜻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주위의 사정이 급격한 근본개혁을 하기 어려우므로 당국의 충분한 양해를 얻어 서서히 도모하자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히 유신회원들을 타일렀다. 다음날 불교총회를 열기로 하여 가까스로 회의장을 수습했다.
다음날인 1922년1월9일에 열린 조선불교총회는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백양사 석왕사 위봉사 봉선사 송광사 기림사 건봉사 등 10개 본산주지와 유신회원들만으로 개최되어 중앙기관으로 각황사에 「총무원」을 두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동조하지 않은 본사에 문호를 개방하여 흡수하고, 3월 안에 종헌과 제반규칙을 기초하여 불교총회에서 통과제정하기까지, 또 총독부의 인가를 받기까지는 임시 총무원이라 하기로 했다.
그리고 총무원의 기구로는 포교와 교육을 맡는 이무부와 서무와 재무를 관장하는 사무부를 두기로 하였는데 임시 원장에 곽법경(위봉사), 이무부장 오성월(범어사), 사무부장 이회광(해인사), 부원에 유신회원인 유석규 황경운 임석진 김지현 스님을 선출했다. 또 총무원의 전횡을 막는 제도적 장치로 7명의 의사로 구성된 의사회를 두어 총무원의 일을 사전에 검토하고 사후에 감사하게 했다.
의사로는 강도봉 기석호 정황진 강신창 이지광 박한영 김석두 스님 등이 선출되었는데 모두가 유신회원이거나 유신회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한편 불교총회를 반대하는 본산주지들은 11일 각황사 내 주지회의소에서 주지회의를 속개했다. 그러나 회의벽두 주지회의를 참관하러온 총독부 종무과 주임 「와따나베」(도변창)가 주지와 유신회원을 모아놓고 해가 지도록 일의 전말을 조사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시바따」(시전) 학무국장이 나와서 30본산주지회의를 옹호했다.
『30본산 연합제규는 불교사업을 수행하는데 편리를 도모하고자 제정하여 당국의 인가를 얻어 지금까지 시행해 오고 있다. 그러나 30본산 연합사무소의 사업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제도를 개혁하고자 일어난 것이 유신회다.
유신회의 개혁안 중에는 이상적으로는 좋은 것도 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할 것도 없지 아니할 것이며, 개혁에 적당한 의견도 있을 것이나, 그것은 당국에서 법령으로 입증한 회가 아니므로 사사로운 것이다.
또 불교총회에서 결의한 일도 사사로운 회에서 한 것이니까 당국에서 간섭은 아니 할 터이지만, 주지총회만이 법령으로 인정한 회이므로 청년 중에서 회의를 방해하는 일이 있으면 경찰권을 발동하여 제재를 가할 것이다.
또 불교총회의 결의사항을 아직 정식으로 듣지 않았으므로 어찌하겠다고 지금 말할 수는 없지만 30본산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은 승인할 수 없다.
그리고 유신회 운동에 불온한일만 없으면 상관하지 않겠다.』
이때 회의장에는 「마쓰무라」(송촌) 경무국장이 두 사람의 사복경찰관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일이 이같이 되자 회의장은 아연 긴장했다.
유신회 측은 이 같은 일은 반대파 주지들이, 관권을 빌어 억압하는 것이라고 흥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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