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한반도 전시 대비 물자 2007년부터 비축 않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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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시에 대비해 주한미군이 비축한 탄약.물자를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2006년 말로 폐지한다고 미국이 통보한 사실이 8일 확인됐다. 주한미군 사령부는 "지난해 5월 20일 당시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이 조영길 국방부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전시예비물자(WRSA-K) 프로그램을 2006년 12월까지 폐지한다는 것을 알렸다"고 공개했다.

WRSA-K는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발한 직후 한.미 양국군이 공동 사용하는 탄약 등 전시 물자다. 이를 관리하는 WRSA-K 프로그램을 중단하면 한국이 협상을 통해 새로운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해당 탄약.물자를 무상으로 넘겨받거나, 일부를 사들이지 않는 이상 미국은 전시 물자를 한반도에서 철수시킨다.

서한에서 울포위츠 부장관은 "WRSA-K 프로그램과 (WRSA-K 이외에 한국에 필요한 전시 물자인)긴급소요부족품 목록(CRDL) 이행은 과거 한반도 평화와 안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당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지했다.

주한미군은 서한을 공개하며 "세계 11위 경제대국인 한국 상황을 고려할 때 수년 전부터 더는 전시비축물자를 유지하는 게 불필요하다고 판단돼 왔다"고 설명했다. 주한미군은 또 "미국은 원래부터 WRSA-K 프로그램을 영구적으로 운영하려는 생각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채병건 기자

뉴스분석

주한미군이 8일 '전시예비물자(WRSA-K) 프로그램'의 중단 방침을 공개한 것은 이례적이다. 내용이 직설적이고 시기도 미묘하다. 방위비 분담금 감축에 대해 찰스 캠벨 미8군 사령관이 불만을 표시한 직후에 나왔다. 한.미 군사동맹 관계가 이상 기류를 보인다는 우려가 나오는 와중이었다.

"서한은 비문(秘文)이 아니다"라는 국방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의 서명이 담긴 문서를 언론에 돌린 것은 외교관례상 전례가 없다. 서한 요지도 "(한국의 경제력을 감안할 때) WRSA-K 프로그램 등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식의 사무적인 것으로, 한국 측을 납득시키려는 노력이 미흡하다. 일방통보의 성격이다.

그동안 WRSA-K는 미군의 전쟁 억제력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인용돼 왔다. 전국에 비축된 WRSA-K는 90% 이상이 각종 탄약이다. 포탄에서 미사일까지 280종 58만t에 이른다. 그 가치는 5조원에 이른다. 한반도 유사시 탄약 필수 소요분의 60%라는 분석도 있다. 미군이 한국의 부족한 탄약을 채워주는 형태였다.

따라서 WRSA-K 프로그램 중단은 한국의 국방비 부담 증가를 의미한다. 반대로 이 프로그램을 살리자면 미국의 방위비분담금 증액 요구가 예상된다. 전시에 이 탄약.물자를 한.미 양군이 공동 이용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방위비 분담금 중 340억원이 WRSA-K 유지비로 들어갔다. 결국 2007년 미국이 WRSA-K를 한반도에서 뺄지는 한.미 협상에 달려 있다. 국방부는 당장 협상할 사안이 아닌 데다 이 문제가 여론의 관심사로 부각되면 협상력만 떨어진다는 이유로 이 통보를 그간 공개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주한미군은 "미군이 WRSA-K를 한국에 팔겠다고 제안한 적이 없다"며 일부 언론 보도에 정정을 요구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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