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맹정진 수행법엔 정답이 없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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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5년 전부터 안거 때 선방에 들어가면 위파사나로 수행을 해왔습니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엄두를 내기 어려웠죠."

경남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지리산 중턱의 토굴에 은거 중인 도현(55.사진) 스님의 이 말은 뜻밖이었다.

선원 수좌들 사이에 상당한 수행력을 인정받고 있는 스님이 안거 기간에도 간화선(看話禪:조계종이 인식하는 최상의 수행체계)이 아닌 위파사나(남방 불교 수행법)를 하고 있었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다 같은 수행인데 숨길 것도 없다"며 가볍게 넘겼다.

위파사나와 간화선의 차이는 뭐며, 어느 게 정통일까. 이 물음에 선뜻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지난 2월 말 전북 남원의 실상사에서 열린 제 7회 선우논강에서 이를 주제로 논쟁을 벌였지만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도현 스님은 "간화선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화두로 삼고 있다"는 말로 얘기를 시작했다.

"선사들에게 '나란 어떤 존재입니까'라고 물으면 '뜰 앞의 잣나무'니 '똥막대기'니 하는 대답을 듣지요. 그러면 수행자는 그 뜻을 간파하려고 의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또 언젠가는 나도 깨칠 수 있다는 신심(信心),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는 분심(憤心)이 그 뒤를 따르게 됩니다."

간화선의 핵심은 교외별전(敎外別傳:경전에 의하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직접 전하는 것), 직지인심(直指人心:교리를 떠나서 직접 사람의 마음을 교화하는 것), 견성성불(見性成佛:자기가 본래 가진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도현 스님은 "이 모두가 중국 선사들이 체계화한 것이지만 부처님의 뜻을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며, 간화선 또한 훌륭한 수행법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위파사나는 변화 무상한 존재의 특성을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살피는 점에서 간화선과는 다르다. 움직이건, 앉아 있건, 생각하건, 말을 하건, 침묵을 지키건 상관없으나 늘 정념(正念)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볼 수만 있다면 똑 같은 수행으로 여긴다.

"위파사나 수행에서는 그때 그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느낌이라는 단서를 빌려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느낌을 알아차리긴 하되 그 느낌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느낌을 느낌 그대로 알아 차리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쉽게 설명한다는 데도 무척 어렵다. 구체적인 예를 요구했더니 스님은 강을 들고 나왔다. "강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온갖 부유물이 떠내려 옵니다. 꽃송이.음료수병.나뭇가지 등등. 그러면 꽃이구나, 병이구나, 나뭇가지구나 하고 그저 알아 차릴 뿐 아름다운 꽃이 왜 저렇게 떨어졌을까 하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느낌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위파사나는 정념으로 공부를 하는 수행이다. 정념을 놓지 않으면 늘 자신의 내면을 챙기게 된다. 또 위파사나에서는 정적인 상태에 놓일 때는 늘 자신의 호흡을 관찰한다. 도현 스님은 호흡에 마음을 두는 것을 운전자가 끊임없이 차선을 보는 것에 비유했다.

도현 스님이 수행법을 위파사나로 바꾼 것은 1988년이었다. 범어사에서 남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선방 생활 20년 만에 수행방법에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당시 송광사 방장이었던 일각 스님의 배려로 태국에서 8년 공부하고 스리랑카와 미얀마.인도 등지를 순례했다.

귀국한 뒤로는 쌍계사에서 자동차로 20여분이나 더 올라가는 지리산 중턱에 한 평짜리 방을 갖춘 네 평 규모의 토굴에 살면서 위파사나 수행에 매진하고 있다.

스님은 "현재 조계종에서 위파사나 수행을 하는 스님이 1백 명은 될 것"이라며 "위파사나를 수행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여 수행의 다원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하동=정명진 기자

*** '위파사나'란 정념(正念)이 곧 깨달음이라는 남방 불교의 수행법으로 '존재의 특성'을 의미하는 '위'와 '본다'는 의미를 지닌 '파사나'의 합성어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음으로 얻는 '찰나의 열반'을 확대하다 보면 화를 줄여 나갈뿐 아니라 화가 솟기 전에 미리 죽이는 경지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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