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맛」새삼 느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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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오늘날 정치처럼 우리의 삶을 폭넓게 규정하는 힘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국내외적으로 두루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 기이하게 우리는 지금 정치의 「맛」은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 밖에 맛보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 안보문제, 경제성장을 위한 강력한 경제집행력의 필요성 같은 것이 그 이유가 되리라.
그런데 신민당 전당대회 같은 것은 이를테면 그「맛」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의 관심은 주로 그 맛의 결핍 감에서 나오는 것이리 라. 그리고 그것은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신민당 전당대회를 한번 참관해보지 않겠느냐는 신문사의 제의에 내가 즐겁게 동의한 이유도 그 언저리에 있다.
신문사의 두 정치부 기자와 함께 새로 지은 마포의 신민당사에 도착한 것이 오전8시30분 벌써 당사 앞은 열기로 가득 차있다.
차기의 당총재로 입후보한 각 후보들을 지지하는「피킷」과 구호들, 그리고 박자에 맞춘 육성의 구호 외침, 그런 것들이 「맛」을 내고 있다. 우선 흥겹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어둡다. 「맛」을 잃게 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지난번대회(각목대회라는 말을 상기하기 바란다)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낌새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9시30분이 되자 동업 이청준선배와 매우 닮은(우리 동업자끼리는 자주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다) 홍안의 김영삼 후보가 도착한다. 지지 대의원과 당원들의 열광 어린 환호가 일어난다. 그리고9시40분에 이기택 후보, 그보다 조금 늦게 신도환 후보, 그리고 그보다 쪼끔 늦게 현 당대표인 이철승 후보가 도착한다. 역시 지지 대의원과 당원들의 열광적인 환호. 곧이어 전당대회의장에 의해 기다리던 개회가 선포된다. 오늘의 주 의제는 뭐니뭐니해도 차기의 당총재 선출. 되도록 여타의 의제들은 간략하게 처리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차차 장내는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의사진행 측의 노력과 후보·대의원들의 자재로 비교적 질서 있고 부드럽게 회의는 진행된다. 새로운 전당대회의장단 선출까지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위한 정회.
하오1시50분, 속회선포에 이어 마침내 차기 당총재의 선출을 위한 투표가 시작된다. 긴강과 열기가 고조된다. 각 후보들은 벌써 몇 차례나 대의원석을 누비며 대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눔으로써 자신에 대한 지지를 다짐해왔지만 다시 한번 같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투표는 비교적 질서 있고 순조롭게 진행, 맛을 잃게 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처음부터의 예상도 그랬지만 2차 투표로 이·김 두 후보의 대결로 압축되었음이 확실해졌다. 이 후보의 <중도통합론>과 김 후보의<정당성 회복론>의 대결로 압축이 된 셈이다. 남은 것은 이제 두 후보의 막후 정치력과 바뀐 상황에 따른 대의원들의 두 후보에 대한 향방에 달려있다.
다시 정회가 선포되고 숨막힐 듯한 열기와 긴장의 시간이 흐른 뒤 배후정치의 결과도 드러나지 않은 채 2차 투표가 시작된다. 그러나 20여분이 지나자 드디어 그 첫 결과가 나타난다.
이기택 후보가 김영삼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 그것. 김영삼 후보 지지 대의원들의 열광 어린 환호가 장내를 뒤덮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5분쯤 후 이번에는 이철승후보의 막후정치의 결과가 나타난다. 신도환후보가 이철승후보를 지지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이번에는 이 후보측 지지 대의원들의 떠나갈 듯한 환호. 흥분과 열기는 절정에 달한다.
순간 나는 이것도 정치의 한「맛」이로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이제 2차 투표의 결과, 김영삼후보가 불리 할 것이라고 점치는 사람들이 많다. 투표가 끝나자 사람들의 촉각은 온통 개표대로 쓸린다. 그런데 결과는 점치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김영삼후보의 대역전승.
장내가 뗘나갈 듯한 환호성과 함께 때마침 김후보의 송리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장내에는 일제히 전등이 환하게 켜진다.
곧 정치적 경쟁자에 대한 격려와 칭찬을 빼놓지 않은 .새로운 당총재의 열기띤 당선인사가 있은 뒤 쓰라린 패배를 자제심 깊게 받아들이고 승자의 두 손을 번쩍 치켜올려 준 이후보의 꿋꿋한 인사말. 정치의 맛 중의 하나였다. 내가 열기의 신민당사를 빠져나온 것은 저녁8시 반쯤. 그러니까 나는 꼭 12시간동안 정치의 맛 속에 흠뻑, 그리고 달게 빠져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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