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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명문장 <17>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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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옛날 형가가 역수(易水)를 건너려 할 때 한참을 출발하지 않자 연나라 태자 단(丹)은 그가 후회하여 마음을 바꾸지나 않았나 의심해 어린 협객 진무양을 먼저 보내자고 했다. 형가는 노하여 태자를 꾸짖으며 “내가 아직 머물러 있는 이유는 나의 손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가려 해서라오” 했다. (…) 그런데 형가가 기다린 손님이란 또한 성명을 가진 인물은 아닐 것이다. (…) 정말 천하에 그 사람이 있다고 하면 나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은 신장이 일곱 자 두 치, 눈썹은 짙고 수염은 푸르며, 턱이 둥글고 이마가 갸름할 것이다.

- 박지원 『열하일기』 중에서

서울 안암로 고려대 구법학관 3층 심경호 교수 연구실은 책의 미로다. 선친과 직접 만든 책꽂이에 수납한 책들을 심 교수는 두 눈 감고도 찾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쓴 글이다. 큰물이 져서 며칠을 의주에 머물다가 압록강 건너 중국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박지원은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형가(荊軻)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대학 3학년 때인 1977년 봄, 토요일마다 『열하일기』를 읽었는데 그 첫 부분에서 이 대목에 접하여 깜짝 놀랐고 또 한편으로 너무 기뻤다. 국문학도였던 나는 철학을 부전공으로 하면서 문학과 철학의 접점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철학적인 주제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방식이 우리 고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한 2학년 때는 김태준이 한국한문학을 골동품으로 규정하고 『조선한문학사』를 집필했던 발상에 동조해 한문 공부는 한문학의 결산 보고서를 작성하는 수단일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열하일기』의 이 문장을 접하고 한문으로 작성된 우리 시문들을 일생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전국 시대 연나라의 태자 단은 진(秦)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으면서 고초를 겪다 간신히 연나라로 돌아온 뒤 그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당시 검객 형가는 연나라 시장에서 개백정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었다. 태자는 형가를 국사(國士)로 대우해 주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형가는 “바람은 스산하고 역수는 차가워라, 장사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노래를 부르고 태자의 전송을 받으면서 역수를 건넜다. 진시황을 죽이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행동은 의리에 부합하는 것으로 두고두고 회자됐다.

 『사기』에 보면 형가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태자가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는지 의심해 열세 살의 협객 진무양을 먼저 보내려 했다는 대목이 있다. 형가는 ‘나를 의심하다니, 이다지도 나를 알지 못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해 불끈 화를 냈다. 그는 “내가 아직 머물러 있는 이유는 나의 손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가려 해서라오”라고 말했다.

 그가 기다리던 손님이란 대체 누구인가? 『사기』는 그 사람이 먼 곳에 있기 때문에 기약에 맞춰 오지 못했다고 적었다. 고전 연구자들 가운데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살펴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박지원은 형가가 기다린 손님은 이름을 지닌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의지를 발동하는 형가 그 자신이었다고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1780년(정조 4) 음력 5월 25일, 박명원이 진하 겸 사은을 위한 별사(別使)의 정사로 중국으로 향할 때 박명원의 삼종제였던 박지원은 군관의 직함으로 관광길에 올랐다. 일행은 1780년 음력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8월 1일 북경에 도착하고, 2일 일행 일부가 주야로 행군해 9일 열하에 도착했다. 10일 사신들이 피서산장에서 거행되는 만수절 식전에 참여한 후 그 일부 일행은 15일 열하를 떠나 20일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다. 박지원도 열하를 왕복한 뒤 한 달 남짓 체류하다 9월 17일 북경을 출발해 10월 27일 서울로 귀환했다. 그 후 박지원은 3년간 개성 근처 연암에 있으면서 일기를 정리했다. 그것이 『열하일기』다.

 인용한 글의 생략 부분에서 박지원은 형가와 사마천의 속을 들락날락하듯이 그 마음을 추론했다. 형가의 관점에서 보면 한 자루 비수를 끼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강포한 진나라로 들어간다면 저 진무양 한 사람이면 이미 족하거늘 어찌 별도로 다른 동지가 필요했겠는가. 차가운 바람을 받으며 노래와 축(筑) 악기로 그날의 즐거움을 다할 뿐이었다. 그런데 사마천은 ‘그 사람이 멀리 살아서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부연했다.

 ‘멀리 산다’는 말이 참 교묘하다! (만일 그 사람이 실재한다면) 그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절친한 벗이고, 그 기약은 천하에 변치 말아야 할 신의였다. 천하에 둘도 없는 벗으로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기약에 임했거늘 어찌 날이 저물었다고 오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그 사람의 거처는 반드시 초나 오, 삼진의 먼 곳이 아니요, 또 반드시 이날 진나라에 들어가자고 기약해 두 손 잡고 간곡하게 약속한 것이 아니리라. 다만 형가가 의중에서 문득 이 손님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글쓴이가 형가의 의중의 손님을 두고 ‘그 사람’이라고 부연하되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으니 알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멀리 산다’라고 말해 형가를 위로한 것이요, 또한 그 사람이 혹 오지 않을까 저어해서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하여 형가를 위해 다행으로 여긴 것이다.

 형가가 기다린 의중의 손님이란 타자가 아니다. 그것은 의지를 발동하는 형가 자신이었다. 이렇게 박지원은 인간 행동에서 의지의 중요성을 읽었고, 의지를 지닌 인간 주체의 모습을 발견했다. 의지를 지닌 인간 주체는 갈등하는 존재요, 스스로 행위를 선택하는 존재다. 그의 중국 여행은 곧 그러한 결단의 행위였다.

 “정말 천하에 그 사람이 있다고 하면 나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은 신장이 일곱 자 두 치, 눈썹은 짙고 수염은 푸르며, 턱이 둥글고 이마가 갸름할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면 나는 언제나 ‘흐흐’ 웃는다. 너글너글하게 고전의 글귀를 풀어나가면서 인간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는 이런 사람을 나는 늘 마주하고 있다.3

한 눈으로 공부 ‘독안룡’

심경호(59) 교수는 스스로 지은 별호가 ‘독안룡(獨眼龍)’이다. 서울대 재학 시절 서울 답십리에서 관악캠퍼스까지 두어 시간 통학버스에 흔들리며 책을 보던 습관 탓에 오른쪽 눈의 망막이 손상됐다. 그 뒤로 30년 넘게 왼쪽 눈에만 의지하면서도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 보자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당나라의 맹장 이극용처럼 학문세계의 ‘독안룡’이 되겠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몇 년 전에는 뇌종양 수술을 두 차례 받고 오른쪽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신체적 시련을 공부와 글쓰기로 이겨낸다. 단독 저서 30여 권, 번역서 40 여 권이 그의 자부심이다. 1955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교토대 중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문산문미학』 『한시의 세계』 『한국한문기초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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