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수필…신변잡기인가|홍기삼<동국대교수·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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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오늘날을 산문의 시대라고 말한다. 과연 소설과 수필은 이 시대가 아무리 공업사회적인 물질주의로 팽만해간다 하더라도 그런 사회적 배경과 상관없다는 듯 날이 갈수록 양적 증대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학의 여러 가지 형식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정의되지 못한 수필이라는「장르」가 이렇게 활발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문필가가 체험한 일이겠지만 수필의 기본적인 속성은 「글짓기」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일상에서 얻은 절실한 경험을 문학형식으로 재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문득 어린 시절의 작문이라는 체험을 통해 느꼈던 창조적 황홀감이 되살아나 글을 쓰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에 속하며 그럴 때의 문학형식은 비전문가적인 수춘이나 재능을 가진 사람도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필형식을 선택하는 일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필문학이 가진 여러 가지 잡다한 문제점들의 근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문학이라는 창작행위는 고도의 정밀한 훈련과 피나는 노력, 그리고 선험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체험과 창조적 욕망을 가졌다 해서 그것이 바로 창조적 성과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창조적 정열이 절대로 그 성과를 약속해주는 것도 또한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적인 성찰을 생략한 채 많은「아마추어」수필가들이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문학 이전의 신변잡기를 발표하고 있고 그것을 발표하는 수가 너무도 많아서 언뜻 보기에는 수필의 홍수, 또는 수필가 사태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내용이나 수준이야 어떻든 잠시라도 원고지 앞에 앉아 창조적인 아름다운 시간을 갖고 그러한 체험을 동시대의 많은 사람과 나누어 가지려 하는 것이 얼마나 가상한 일이냐고 말한다면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거기서 그친다면(실제로 거기서 그치는경우도 많지만) 참으로 좋은 일이며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수필가 행세를 하기 시작하고, 더러는 수필가단체를 만들어 감투를 쓰고, 더러는 문학단체의 회원이 되어 선거운동에 열중하기도 하고, 더러는 심히 뻔뻔스럽게도 국제「펜」대회에 소위 <한국「펜」대표문인>자격으로 참가하기도하며 시장판보다도 더 부끄럽게 타락해버린 문단에 끼어들어 그것을 쥐고 흔들어 보려는 생각마저 가지려는 분들이 조금씩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사태에 우리는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이와 같은 현상의 주요한 책임은 수필문학의 형식적 특징과 우리 나라 문화층의 얄팍한 두께에서 동시에 검토될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도 수필가와 잡문가(miscellanist)를 구분하기가 모호한 경우가 많고 우리 나라 역시 사정은 비슷한 형편이다.
이른바 수필문학의 무형식성, 내용의 무제한성이라는 조건이야말로 수필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함정이며 바로 <붓 가는 대로 쓴다>는 작법상의 무규칙적인 속성이 사실은 가장 엄격한 주관적 작법과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허허실실의 논리임을 깨닫지 못한데서 혼란이 초래되는 것이다.
형식상 또는 내용상의 무제한성 때문에 수필·작문·서간·자서전적 고백문·신변잡담·기행문·사설·시평·「칼럼」·연설문·육아일기·「논픽션」류 등과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이 일어나게 되고 철학교수·산부인과 의사·「탤런트」·기업체 사장·법관·정치가· 유한부인 등의 여기·소일거리 또는 장기자랑의 한 방편이 되어주기도 한다. 심지어 지지난해의 경우 수필문학의「붐」이 일어서 우리 문단에는 <수필집 한 권 못 내면 간첩>이라는 농담조차 돌아다닐 정도로 우리의 문학계나 문화계층은 유행과 상업주의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도 지혜롭지도 못했던 것이고 그런 이유로 수필문학의 옥석분별이 어렵게 된 것은 물론, 극심한 문화공해의 한 부면을 담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든 문학적 성과를 이룩한 수필과 이루지 못한 것의 판별은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이 유행적·상업적 현상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더러는 돈 많은 자들의 한심한 장기자랑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수필과 문학에 대한 관심의 증대 그 자체는 대단히 중요한 사회추세의 하나로 파악하면서 그것의 문학적 성장과 승화를 기대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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