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명 예기해석싸고 가열되는 「기자조선」논쟁|고조선땅에선 발견안돼 부정론|운반어려워 전래안한듯 긍정론|잇따른 논문…결론은 못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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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년초에 재열된 「기자조선」에 관한 논쟁은 비록 결정적 단계에 이르지는못했으나 긍저·부정론간의 입장과 문제가 차차 분명해지는것 같다.
기자조선이 대릉하방면에 실재했다는 이형구씨의 논문 『중국동북신석기시대급 청동기시대지문화』가 연초에 나온데 이어 김연학씨(전부산대교수)가 『기자조선은과연 존재했는가』(월간중앙3월호)라는 부정론을 폈으며 이에대해 천관우씨가 『기자조선이란 무엇인가』(월간중앙 4월호)를 발표, 긍정론을 폈다.
한편 김정배교수(고려대)는 『한국고고학에서의 시대구분문제』(한국학보14집)에서 부정적 논지를 굽히지 않았다.
먼저 김정학씨는 고고학적입장에서 ①「기후」명이 있는 동기가 반드시 기자와 관계있다고 볼수는 없으며②이른바 「고죽」명은 「@@」을 그렇게 읽은 것으로 타당하지 않으며 ③은·주·춘추시대의 영역은 장성을 넘지 못하였고 ④장성지대와 요녕지방에는 은·주의 청동기와 다른「시베리아」계의 북방적 청동기가 지배적이다. ⑤은대고죽국을 요녕으로 추리하는 것은 옳지않다. ⑥만일 객좌현지역이 기자조선의 발상지라면 여기서 발견된 청동기가 기자의 통치력이 미친 고조선영역에도 파급되었을텐데 그런 발견이 없다. ⑦객좌현 출토의 청동기들이 기자조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⑧화북의 육로로 장성지대·요녕·한반도로 옮겨졌으며 해로로 산동반도에서 발해만 연안을따라 옮아왔다. 그 문화전파는 「알타이」족의 이동에 의한것이며 결코 기자에 의한 것이 아니다. ⑨따라서 기자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이라고 주장했다.
김정배교수도『우리청동기시대를 동이족이나 은족과 지나치게 밀착시켜서는 안되며 기후명문 유물들은 전통적 은의 유물이며 결코 우리 청동기와는 직접 관계되지 않는다』고 지적, 종래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청동기예맥조선설」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천관우씨는 문헌사학의 입장에서 『「사기」「한서」등 사서의 기자에 관한 기록이 잘못이라는 적극적 근거가 있기전에는 그것을 우선은 따르고 보는것이 도리어 온당한 사료비판』이라고 주장하면서 긍정론을 폈다.
①발해방면에서 발상한 은상이 하·주등 화하계와 구별되는 동이계로서, 은의 대세력이었던 기자족도 동이계로 볼수있다.
②기자조선문제는 기자재인보다 기자족이란 집단으로 파악해야하며 은말주초의 이들의 본거는 태원남방 지금의 산서성태곡의 「기」지방이다. ③주가 성하면서 기자족은 태곡을 떠나 동천을 시작했다. ④주는 신흥왕조의 명분을 위해 이방적 형식적으로 권위있는 인물인 기자를 「조선」에 봉해야 했다. ⑤기자족의 일부는 산서에 잔류하고 그 주력중 일부는 산동으로 다른일부는 우선 찬하-대능하방면(고죽국지역도포함)에 정착했다. ⑥@@을 @죽-「고죽」으로읽는 것은무리가 없다. ⑦기자족은 오랜 세월동안 요서·요동·평양으로 이동하면서 계속「조선」으로 불렸다. ⑧「기자」명 예기가 대능하·북경부근뿐 아니라 산동·하남에서도 나온것은 기자족 분포를 반영하며 단지 객좌현의 예기가 지금까지 그 이동한반도 등에서 발견되지 않는것은 기자족이 이들 예기를 현지에서 만들지 않고 가지고 왔을경우 운반이 어려웠음을 뜻한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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