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막으려면 생산성 커진 만큼 월급 더 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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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이 지난 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03차 ILO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번 총회에서 ILO는 “금융시스템의 개혁 없이는 소득 불균형이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네바 AP=뉴시스]

“기업 이익이 늘어도 재투자되지 않고 금융으로 빨려 들어간다. 금융위기 재발을 막고 고용 없는 성장에서 벗어나려면 생산성 향상만큼 임금을 올려야 한다.”

 국제노동기구(ILO)의 경고다.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12일까지 스위스 제네바 ILO 본부에서 열린 제103차 총회에서 나왔다. 이번 총회에는 185개 회원국 정상을 포함한 정부 대표와 노사 대표가 참석했다. ILO의 이 같은 경고는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고용 사정을 분석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ILO 이상헌 연구조정관은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각국 투자와 고용, 정부의 재정 흐름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고 말했다.

 ILO는 ‘임금 억제→기업 투자 촉진→고용과 소득 증가’라는 패러다임이 깨졌다고 봤다. 세계 각국의 노동생산성은 계속 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임금도 동반 상승해야 한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임금이 노동생산성보다 적게 올라 그 차이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업이 이윤을 착취하는 것은 아니다. ILO는 유럽의 살림꾼 역할을 하는 독일을 예로 들었다. 독일은 90년대 경기가 좋지 않자 노동생산성이 3% 올랐지만 임금은 2%만 올리기로 노사 간에 합의했다. 그런데 이 차액(1%)이 투자로 이어지지 않아 선순환 구조가 깨졌다는 것이다.

 노동소득은 줄고, 자본소득은 늘었는데 투자가 안 되는 이유가 뭘까. 2008년 이후 유럽연합(EU) 역내의 투자는 거의 제로(0)에 가깝다는 것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ILO의 분석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이윤의 상당 부분이 비생산적이고 투기적인 금융으로 흘러 들어가 잠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ILO의 진단 결과다. 금융회사들은 이 돈으로 각종 금융상품을 내놓는다. 근로자나 기업이 가진 부동산과 같은 자산을 담보로 하고서다. 여기에 돈이 몰리면서 가계부채는 늘고, 금융자산은 쌓이고, 투자는 줄어드는 구조가 형성됐다.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를 불러온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이런 금융상품이 빚어낸 참사라는 것이다. 그 결과 선진국을 중심으로 3180만 명의 실직자가 발생했다. 정부는 부실 기업을 떠안고, 실직자를 돌보느라 부채가 크게 증가했다. 기업의 금융의존도도 심화되고 있다. 결국 기업과 노동자, 정부가 모두 손해를 보게 되고, 글로벌 경제도 휘청거린다는 얘기다. 이 연구조정관은 “이런 상황에선 성장만으로 빈곤과 싸울 수 없다”며 “고용 없는 성장을 초래하고, 소득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금융시스템을 개혁하지 않으면 글로벌 경제 위기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이 연구조정관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1분기 중 자금 순환’에 따르면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서 돈을 쓰고, 기업과 가계는 소비와 투자를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조정관은 “특히 한국의 제2금융권 이자는 범죄 수준”이라며 “각급 금융기관이 수수료와 같은 금융비용만 줄여도 가처분 소득이 늘고, 인센티브도 늘어나게 된다”고 분석했다. 자본 소득에 대한 통계가 없어 관련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꼽았다.

 한국의 고용정책이 중구난방이란 지적도 나왔다. 이 연구조정관은 “일자리 정책은 하나씩 쌓아야지 뿌리면 안 된다. 효과를 보거나 검증되기 전에 또 다른 정책을 우후죽순처럼 내놓는 바람에 고용시장을 혼란케 한다”고 말했다.

제네바=김기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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