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위 자술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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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는 금년 서정쇄신 추진의 중점목표를 경제이권형부조리의 시정에 두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부조리추방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해 민원업무 공무원과 국영기업체 임직원을대상으로 과거의 비위나 부조리에 대한 자술서와 앞으로 부조리 추방을 다짐하는 서약서를 제출도록 했다.
부정부패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제출이나, 선서대회는 전에도 없지 않았던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다짐이 장기적으로 별로 큰 효과가 없었던 것도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비위에 대한 자술서제출요구는 일찌기 없던 새로운 일이다.
부패방지법과 감시체제가 철저하여부패추방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싱가포르」에 부분적으로 이 비슷한 제도가 있긴하다.
「싱가포르」에서는 직·간접의 뇌물수수는 물론 관습상의 단순한 선물수수도 금지되어있다. 다만 외국인으로부터의 선물을 공무원이 거절하기곤란할 경우에는 이를 받고 소속기관장에게 신고하도록 되어있다. 이렇게자술을 하면 형사상의 책임은 면제되나 신고된 선물의가액을 급료에서 공제 당한다.
자술하면 처벌은 면하되 그로 인한재산상의 이득은 회수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예와 비교할때 이번의 자술서제출요구에는 몇가지 미심한 점이 있다.
자술된 과거의 비위에 대해서는 신분 및 형사상의 책임추궁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재산상의 이득은 어떻게 처리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자술서를 통해 밝혀진 불법적인 재산상의 이득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이는 부정축재를 추인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우려가 없지 않다.
혹시 자술된 뇌물수수가 가계보전적인 정도로 미미하다면 또 모르지만, 치부적 성격을 지녔다면 그것은회수되는게 당연하다.
또 자술서를 제출한 수회자를 처벌하지 않을 경우 이회자의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도 생긴다.
형법의 뇌물죄는 증수회자를 모두 처벌하게 되어있다. 따라서 법의 형식논리상으로는 수회자를 처벌치 않으면서도 증회자를 처벌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다 비난을받는 수회자는 처벌치 않으면서 증회자를 처벌한다는 것은형평에 어긋나는 일이다. 또 실제문제로 증수회자간에는 나쁜 의미의 의리관계가 생기기 때문에 공무원이 자기의 비위를자술하고 싶어도 자신에게이득을제공한 사람이 처벌된다면 자술하기가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보다 기본적인 문제로 과연 얼마나 많은「비위」공무원들이 자술서를 제출하겠느냐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자술서 내용의비밀이 보장되고 신분및 형사상의 책임추궁을 받지않게 되어있다 하더라도 두고두고 자신의 기록으로 남을 비위를 솔직이 고백할 사람이 얼마나있을는지 의문이다.
아에 자술을 외면하거나 경미한 비위의 부실한 자술로 때우려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술서와 서약서제출 요구는 공무원들에게 단기적으로 부조리행위를 삼가도록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예방적 효과는 있겠으나,부조리의 실상을 파악하고 근절하는데는 큰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역시 서정쇄신이 뿌리를 내리자면공무원의생활급 보장과 사회·경제풍토의 가치평형감 회복이 우선되어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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