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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숙해진 생의 신비탐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소설과 역사의 여러가지 차이점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것은 소설은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상대주의를 정면에 설정한다는 점일 것이다. 역사가 현재를 출발점으로 해서 과거로 이어지는 공간에 서게 된다면 소설은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공간을 점유하게 되는 것으로 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소설적 기술범주에서 제외되는 것은 단 한가지도 있을 수 없고 유일무이의 절대주의도 소설에선 용납되지 않는다. 작가는 그 시대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가장 냉혹한 기술자이고 불온한 증언자이며 일상적 세계에 대한 흉기, 그리고 그런 것들 속에 불입문자로 사랑과 신뢰를 비장하는 자이다. 최근 전집 (경미문화사간·전 12 권)을 내놓은 유주현씨의 많은 소설들은 이와 같은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비평적 과제를 제공한다.
그의 작품 발표량이 너무도 방대하고 그의 작품세계 역시 매우 중요하고도 복잡한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체계있게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씨의 문학적 출발은 바로 좌·우익의 치열한 갈등 끝에 남북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48년에 시작된다.
처녀작 『번요의 거리』 (백민·48·8)를 기점으로 30년이 넘도록 정력적으로 지속돼 온 그의 창작연표는 그 분량에 있어서「발자크」의 저 <정력적이고도 신비한 20년>과 비견될만한 것이다. 단편소설 90편, 중편소설 5편, 대하소설 류를 포함한 장편소설 24편, 수필집 1권 등이 그의 작품목록을 이루고 있지만 『조선총독부』 『대한제국』 『대원군』『군학 도』『통곡』등만 하더라도 2백자 원고지 3만3천장에 달하는, 단행본 30권 정도의 불량이 된다 (출저『문학사의 기술과 이해』 유주현 연구 P102 이하 참조).
유주현 문학의 몇 가지 특징을 요약하면 ①식민지 치하의 노예문화권으로부터 벗어난 분단문학기 제1세대의 문학이라는 점 ②동시대의 작가군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작품세계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는 점 ③다수의 독자를 가지고 있는 작가이며 동시에 시야가 넓은 문학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④작품의 경향이 사회적 배경의 변화를 성실하게 수용하는 긴장된 거울의 역할을 맡아옴으로써 당대의 가장 절박한 상황과 정면으로 대결해왔다는 점. 그리고 관심의 다양성 등을 아울러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유주현 문학은 일단 3기로 구분해서 파악하는 방법이 그의 문학적 전모를 이해하는데 효과적일 것이고 중간결산의 한 방법으로도 유익할 것으로 보인다.
제1기는 처녀작 『번요의 거리』를 발표한 48년부터 『희화사제』를 발표한 59년까지, 제2기는 장편 『분노의 강』을 발표한 60년께부터 장편『군학도』 『통곡』 등을 발표한 69년 무렵까지, 제3기는 단편 『경자의 집』을 발표한 70년께부터 최근까지를 어림잡아 상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구분이 전혀 근거없이 나눠진 편의상의 방법만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가령 제1기가 세태풍속과 사회부조리를 중심으로 파헤친「리얼리즘」류의 작풍이 근간을 이루었다면 제2기는 당대의 원인이 되고 있는 과거의 문제, 즉 역사 인식의 심화를 통해서 윤리와 풍속의 갈등, 개인과 집단의 갈등으로 나타나는 자유의지의 문제로 확대되었고, 제3기에 이르러 죽음·내세와 윤회, 생의 신비 등으로 변모되어왔다는 사실정도는 분명히 판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의 문학적 관심은 사회탐구→역사탐구→내면탐구의 순서로 발전, 변모되어 왔으며 이와 같은 변화는 그의 문학이 드디어 창작의 원숙기에 접어들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가장 값진 차원에서 구명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마저 갖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역사탐구와 인생론적인 신비의 추구 역시 또 다른 이름의 당대주의로 불러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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