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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399)|극단"신협"(제61화)|「수전노」의 대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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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프랑스」작가 「몰리에르」의 대표적 희극 『수전노』에서 나는 주역인 구두쇠영감 「아르파콩」 역을 맡았다.
그 극중엔 손님을 초대하는 장면이 있는데 구두쇠 영감이 성찬을 차릴리 없다. 하인에게 명령하기를 값싼 요리만을 만들라고 한다.
그런데 번역극이다 보니 요리이름이 죄다 원명 그대로 외국이름들이었다. 아무리 이것저것 주워대도 관객들이 무슨 말인지 감을 잡을수 없어 반응이 없었다. 첫회 공연이 끝난뒤 대사를 고쳐 부르기로 작정, 그 장면에서 원명을 모조리 빼버리고 대신『얘야, 잘 차릴것 없다. 간장 고추장에다 된장찌개만 끓여 내놔라』했더니 그제야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이 『수전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연극 공연도중 연출을 맡았던 이광내는 큰 불행을 당했다. 즉 그의 어린 아들이 우물에 빠져 숨지는 변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광내는 이런 슬픔을 안고도 희극을 연출해야만했다.
현실의 큰 비극을 감추고 남을 웃기는 연극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연극인의 비애였다.
희극 『수전노』의 대성공에 힘입어 막을 올린것이 같은 계열의 희극 『불꽃』 이었다.
그런데 유치진 원작의 이 『불꽃』은 원명이 『대추나무』였다. 일제말 연극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유선생이 운영하던 극단 「현대극장」에서 서항석 연출로 출품해 작품상을 탄 작품이었다. 이것을 『불꽃』이라고 고쳐「신협」서 공연했는데 뒤에 수복하여 서울에선 이름을 다시 『왜싸워』로 고쳤다. 한가지 연극을 내용을 조금씩 달리해 3가지 이름으로 바꾼것이다.
수복뒤 대학연극 경연대회가 있었는데 유선생은 그때 이 작품을 『왜싸워』로 고쳐 지정작품으로 하려고 했는데 문방과 문구부가 반대, 큰 시비가 붙었다. 이때의 싸움은 우리나라 연극사상 기록될만한 사건으로 거기에 얽힌 재미있는 얘기는 참 많다. 밝혀둘 만한 얘기이므로 뒤에 다시 따로 언급하겠다.
아무튼 유선생에겐 구작을 새롭게 개작하는 작가적 집념이 있었다.
일제때 「고협」에서 공연했던「마의태자』도 해방뒤「극협」에서 공연할때 내용이 달라졌다. 즉 4막으로 끝난 작품을 1막을 더 추가해 5막으로 한 것이다. 이밖에 역시 일제때 공연했던 『소』도 뒤에『풍년기』로 고쳤다가 다시 『소』로 바꾸는등 구작을 쉴사이 없이 손질해 나갔다. 이름이 바뀔때마다「테마」를 고치거나 막을 더하거나 또는 대사·인물 설정을 바꾸는등 변화를 주었다. 유선생만이 갖는 독특하고 개성있는 습관이었다.
『불꽃』은『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가난한 두집사이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있는데 두 집 홀아비가 늘 이 대추나무 때문에 다툰다. 그런데 그 두집엔 각각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어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일제때 『대추나무』란 이름으로 공연되었을때 그 결말은『좁은땅에서 대추나무 하나로 싸울게 뭐냐. 저 넓은 중국으로 가서 기름진 땅을 가꾸자』며 두 가구가 떠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일제의 압박과 박탈때문에 대추나무 하나를 두고도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은연중에 암시했고 이와 함께 우리농민의 비참함을 항변, 강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불꽃』으로 이름을 바꾸어서는 그 결말부분이 약간 달라졌었다. 즉 남자 주인공(청년)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쫓겨 만주로 떠나는 것으로 했다. 즉 바뀐 내용과 함께 일본경찰이 새로 등장하기로 한것이다.
일제때는 강규식·유계선이 주연을 해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신협」에선 이 작품이 대실패를 보았다.
「신협」에서 최무룡·최은희가 주연을 했고 김동원 내가 두집의 홀아비 역으로 분했었다.
이 연극은 우리 농민의 참담한 실정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면서도 극의 흐름은 배꼽을 쥐게하는 희극이었다. 그런데 이 명작이 왜 실패하였을까? 당시 단원들의 추측은 내용을 고친것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감동을 작게준 요소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했었다.
이 『불꽃』은 지방순회 공연도중 진주에서 처음 막을 올렸다. 그러나 관객이 들지않고 반응이 없어 진주에서만 공연을 끝내고 다른 도시에선 더 공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불꽃』이 뒤에 『왜싸워』로 이름으로 바꾸어 하나의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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