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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신협」|남기고 싶은 이야기들<필자 이해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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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강에 뛰어든 나는 침착하게 앞으로 헤어 나갔다. 수영엔 자신이 있었고 지금도 그때의 실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물살이 세어 무양진역 쯤에 가서야 닿았다. 맨발로 걸어 시흥까지 갔더니 거기서야 장국밥과 신을 팔았다. 요기를 하고 운동화 한 켤레를 사신은 뒤 다시 걸어서 임시수도로 정했다는 수원까지 갔다. 천신만고 끝에 수원에 닿았으나 정부는 이미 대전으로 떠난 뒤였다.
수원에선 용케 화물기찻간 한 틈새에 끼여 탈수가 있었다.
대전에 닿아 임시정부 청사로 쓰고 있는 충남도청을 찾아가니 공보처관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면서 대민 선무를 위한 방송국일을 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나는 서울을 사수한다는 그들의 말에 속았던터라 관리의 말을 믿지 못해 단호히 거절하고 말았다. 다시 대전역으로가 남행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국립극장 사무직원 변순제·김상호를 만났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경리책임자였던 정모씨를 만났다.
성만 알뿐 이름은 지금 기억할수가 없다. 정씨는 유치진선생과 동우인 통영사람으로 유선생이 경리 책임자로 두었다. 그런데 정씨가 큼직한 배낭 하나를 힘겹게 메고 있어『그게 뭐요?』하고 물었더니『몽땅 돈이요』하고 대답했다. 25일이 월급날인데 일요일이라서 일부 직원들은 찾아가고 일부는 찾아가질 않아 이렇게 배낭에 넣어 광나루쪽으로 해서 피난하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용케 갈 가져왔다고 한 다음 공금이니 잘 보관하라고 했다. 넷은 콩나물 시루같은 피난열차에 실려 부산엘 닿았다. 정씨는 고향인 통영으로 떠나고 나는 나머지 두 직원과 함께 초량의 부친 병원으로 갔다.
부산 광복동엔 서울 피난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그런데 피난민사이에선『연극배우 이해랑이 죽었다』는 소문이 좍 퍼졌다. 한강에 뛰어드는 것만 보았지 헤엄쳐 건너는 것은 보지 못했을 뿐더러 연극으로 꽤 얼굴이 알려져 있었던 터라 소문은 쉽게 퍼졌던 것이다.
아는 얼굴을 만날 때마다『아니, 죽은줄 알았는데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깜짝 놀라곤 했다.
여기서 잠시 통영으로 갔던 정씨 얘기를 하자. 서울 수복이 되고 다시 1·4후퇴가 있을 때까지도 정씨의 소식은 감감했었다. 두번째 피난으로 부산에 왔을 때였다. 그때는 대부분의 예술인들이 모두 부산으로 피난해 문총이란 예술인 단체가 생겼다.
하루는 문총엘 나가는 길이었는데 도중에서 정씨와 딱 부닥쳤다. 허름한 옷차림에 수염도 못깎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정씨는 나를 보더니만 『아이고, 이선생 아니냐』고 반가와 했다.
다방에서 들러준 정씨의 얘기인즉.
고향으로 피난은 했지만 전세가 아무래도 불리해 세상이 곧 뒤집힐 것 같은 생각이 들더란 것이다. 그래서 보관하고 있던 직원들 월급을 몽땅 털어 밀선을 마련,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것. 그러나 일본에서 붙잡혀 곧 한국으로 송환했는데 한국경찰에선 중벌로 다스려 군에다 남겼다. 군에서는 다시 일선에 내보내 전사한 시체 운반을 맡겼던 것이다. 고생은 말할 여지도 없었고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겼다는 얘기였다. 이것을 6개월 동안 하다가 이제사 풀려났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역시 남의 돈은 함부로 쓰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주선태도 6·25중 피난을 못가 고생한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연극 『뇌우』공연때 주선태는 배역이 없었다. 그래서 김산에서 공연하는 「예술극회」의 『황진이』에 잠시 출연하면 어떻겠느냐고 나에게 의논해왔다. 당시 나는「신협」의 연기책임자 직책을 맡고 있었다. 「신협」의 전속배우이긴 하기만 며칠간 공연하고 오면 어떠랴 싶어 부산공연만 끝내고 상경한다는 약속으로 「예술극회」출연을 허락했었다.
그때 「예술극회」는 창립공연이었고 강계식·문정숙·윤인자 등이 주요「멤버」였다. 주선태는 처음 약속대로 부산공연만을 마치고 지방공연엔 빠진채 상경했다. 그리고『주우』 가 공연중인 극장엘 찾아 와서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때문에 극장안으론 들어오지도 못하고 지금의 성공회로 들어가는 골목길에서 나에게 돌아왔다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며칠뒤 6·25가 터진 것이다. 그때 주선태가 약속을 무시하고 지방공연에 함께 나섰더라면 적치하의 고생은 면했을 것이다.「예술극회」는 6·25가 나자. 부산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다.
피난으로 부산에 모인 몇몇 연극인들은 피난지에서 새로운 연극활동을 펴기 시작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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