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2)극단「신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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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기서 잠시 내가 연극을 하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겠다.
연극을 시작한지 올해로 만 40년. 그 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문득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연극을 하게 됐나…』하는 의아심을 갖게 된다.
피골이 상접했던 외모, 내성적이고 발표력이 없었던 성격. 배우가 되기엔 한가지도 들어 맞는 점이 없었다.
최근 나는 가까운 두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중의 한사람 이원경(중앙대교수)은 『젊었을 때엔 통 모양을 내지 않고 아무렇게나 「룸펜」행세룰 하고 다니더니만 늙어 가면서 멋을 부린단 말야…』하고 말했다.
다른 한사람, 유한철은 어느 술좌석에서 『너 같이 눈이 조그만 하고 얼굴도 못생긴 사람이 어떻게 배우가 됐느냐?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다른 대답을 못하고 우선 웃기만 했는데 사실 이들의 얘기는 모두 맞는 말이었다. 멋도 없고 외모도 전혀 엉망이던 내가 어떻게 연극을 하게 됐을까?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처음 연극에 관심을 둔 것은 배우나 극작가나 연출가가 되기 위해서는 물론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단순히 내 인생의 도피처로 연극을 택한 것 뿐 이었다.
연극사를 보면 중세 「유럽」의 낭만적인 연극시대에 극단은 젊은 남녀의 사랑의 도피처였다.
계급차이·양가의 불화 등 사회적인 제약이 두 남녀의 애정을 가로막았을 때 젊은이들은 사랑의 도피처로 극단을 찾았고 연극에 몰두하면서 사회의 시름을 잊고 사랑을 불태웠던 것이다.
내 처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애정 때문에 아니었다. 젊었을 시절, 한없이 우울했고 소극적이었고 삶에 자신이 없었을 때 나는 내 인생의 도피처로 연극을 택했던 것이다.
내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1938년 동경 축지소극장서 공연된 『춘향부』(유치진 작·주영섭 연출)이었다. 그때 나이 21세,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 2년으로 「동경학생예술좌」소속이었다.
그때 배역이란 대사마저 몇 마디 없었던 늙은 농부 역의 단역이었다.
의상을 갈아입고 일인 분장시켜 해준 분장을 하고 거울을 들여다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간 곳이 없고 거울에 비친 모습은 생판 낮선 늙은 농부였다. 『야, 희한한 세계가 다 있구나-』하고 생각하는 순간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담뱃대를 드니 나도 모르게 분장에 맞게 늙은이가 돼버렸다. 걸음걸이가 그랬고 목소리가 변했다.
무대에 서서도 전혀 불안감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기가 됐다. 오히려 그 가면 속에 묻혀있을 동안은 말 할 수 없는 깊은 안식에 빠지기도 했다.
연극은 나에게 인생의 새로운 생활과 매력을 안겨준 것이었다. 1년 뒤 나는 「유진·오닐」 원작의 『지평선 넘어』에선 주인공인 「로버트·메이어」역을 맡았다. 노동에 어울리지 않는 시인적인 기질, 아내와의 불화, 그래서 드디어는 폐결핵으로 죽음을 맞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의 그 고통을 느끼며 연기를 하는데 무대에 있는 동안은 그 아픔이 오히려 나에게 안식을 주고 평온을 안겨다 주었다.
자신의 인생을 잠시 쉬고 무대에서 짧은 순간이나마 허구와 가상의 세계에서 남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적인 쾌감과 함께 폭넓은 다른 인생을 체험케 했다.
연극의 매력과 진수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내 본래의 인생으론 할 수 없는 것을 가면을 쓰면 가능했다.
왕건도, 「크로디오스」왕도, 변호사도, 살인자도, 귀족의 생에도 가면만 쓰면 모두 가능했다. 그때마다 내 자신은 그 인물과 같이 대담해지고 사상이 커지고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며 생의 범위가 넓혀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이런 매력에 끌려 평생연극을 뗘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잠시 나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조부 이종응은 철종 왕가의 4층, 조부 이재영은 조선왕실의 의전실장, 아버지 이근용은 경도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개업했으며 4·19직후 한때 부산시장도 지내셨다. 도무지 연극과는 거리가 먼 집안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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