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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국민 행복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는 게 참된 지도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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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호 24면

한스 홀바인(1497~1543)이 그린 에라스무스의 초상화(1523).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민운동, 종교운동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훌륭한 선생님이 돼 청출어람(靑出於藍)한 제자들을 해변가의 모래알 수처럼 많이 키우는 것도 좋다. 세계적·국가적·사회적 어젠다를 형성하는 사설·칼럼을 많이 쓰는 기자가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자식을 많이 낳아 사회의 동량(棟梁)으로 교육하는 것도 좋다.

<33> 에라스무스 『크리스천 군주 교육론』

군왕(君王)이라는 ‘변수’를 중심으로 본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1) 스스로 왕이 되는 것 (2) 임금님의 스승이 되는 것 (3) 군주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국무총리·영의정이 되는 거다.

인류 역사상 왕사(王師)의 길을 꿈꾼 현자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네덜란드에서 한 신부님과 의사의 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라스무스(1469~1536)다. 전염병 창궐 때 부모를 잃고 14세에 고아가 됐다. 1492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나는 돈이 조금 있으면 책을 사고, 돈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면 음식과 옷을 산다”는 말을 남겼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라틴어·그리스어로 된 고대 문헌에 통달했다. 그 결과 그는 유럽의 ‘원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유럽의 여러 왕실은 그에게 여러 문제에 대해 자문했다. ‘인문주의자들의 군주’라 불리게 됐다.

『크리스천 군주 교육론』의 영문판 표지(케임브리지대 「정치사상사 텍스트」판·1997).

르네상스·종교개혁의 핵심 인물
에라스무스가 지은 『크리스천 군주 교육론(The Education of a Christian Prince, Institutio principis Christiani)』(1516)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1500~1558)에게 헌정한 책이다. 에라스무스는 감투나 명예는 대부분 고사했으나 『크리스천 군주 교육론』에서는 ‘아부’도 좀 했다. 당시 군주들에게 경세(經世)의 도를 제시하는 책을 집필하는 게 유행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쌍벽을 이루는 이 책은 『군주론』보다 3년 늦게 탈고됐으나, 출간은 16년이 더 빠른 책이다. 원래 제목은 『크리스천 군주 교육론』이지만 그냥 『군주 교육론』 『군주론』 『교육론』이라고 해도 무방한 내용으로 구성됐다.

역사가 빠르게 움직이던 그때 그 장소에 에라스무스, 그가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핵심 인물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씨를 뿌린 것은 에라스무스, 수확한 것은 루터다”라고.

그뿐인가. 에라스무스는 계몽주의 시대와 근대를 여는 데 필요한 모든 지성적 요소를 일찌감치 다 말했다. 한 국가의 지도자는 선거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남녀평등과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미국 독립선언문보다 250여 년 앞서 “자연은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했다(Nature created all men equal)”라고 외친 것도 그다. 에라스무스는 ‘근대 교육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일반 국민의 교육에 대해서는 『아동교육론(De pueris statim ac liberaliter instituendis)』(1529), 『어린이 예절 핸드북(De civilitate morum puerilium)』(1530)을, 지도자 교육을 위해서는 『크리스천 군주 교육론』을 썼다. 기독교를 믿는 유럽 군주를 위한 책이지만 유교 전통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군자(君子)를 위한 책이다(만약 에라스무스가 불교권에서 태어났다면 『불제자 군주 교육론』을 쓰지 않았을까). ‘교육자들의 스승(the educator of educators)’이라 불리는 에라스무스의 『크리스천 군주 교육론』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백성의 혀가 자유로워야 ‘자유로운 나라’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도덕적 무결성(moral integrity)’이다. 이를 갖추기 위해서는 예수가 군주의 마음속 깊이 뿌리 박혀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일반 백성이나 귀족 이전에 우선 군주 자신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누구한테 배울 것인가. 따뜻하게 제자들을 대하며 도덕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선생님으로부터다(지극히 제한된 ‘사랑의 매’를 제외하고 스승이 제자를 때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런 것들이다.

오래 산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 삶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게 행복한 것이다. 삶을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살면서 어떤 일을 했느냐다.

왕 노릇을 한다는 것은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흠뻑 누리는 것이다. 군주는 백성의 칭송을 듣는 현왕(賢王)이 돼야 한다.

현주(賢主)와 참주(僭主)는 무엇이 다를까. 현주는 국민의 복지(福祉), 즉 국민의 ‘행복한 삶’을 꾀한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대가로 내놓는 게 참된 군주다. 그런 각오로 선정을 베푼다면 군왕이 목숨을 잃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현주의 길은 철학을 아는 왕이 되는 데 있다. 철학이 없는 왕은 참주가 되는 길을 스스로에게 터놓는 것이다. 통치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잘못된 욕구와 그릇된 의견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게 철학이다. 또한 평화시에 최선을 다해 나라를 다스려 전쟁이 필요 없게 만드는 최고의 지식은 지리학과 역사학에서 배울 수 있다.

철학을 가까이 하는 군주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릴 수 있다. 백성 다수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서 군주가 덩달아 같이 좋아해서는 안 된다. 철인왕(哲人王·philosopher king)은 그 자체로서 그 본질이 나쁘거나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안다.

백성의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혀가 자유로운 나라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나라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주셨다.

현군(賢君)은 자나깨나 자식들을 걱정하는 어버이와 같다. 현군은 백성의 목자(牧者)다. 현군은 백성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어야 한다(마키아벨리와 정반대되는 주장이다). 현군은 백성을 섬김으로써 백성의 사랑을 받는다. 사실 폭군 노릇을 하는 게 현군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폭군은 항상 자신의 모습을 거짓으로 꾸미고 백성을 속이려 든다. 위선과 거짓이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더 어렵다.

누구나 한 번 죽는다. 거지나 왕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죽은 다음의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살았을 때 힘이 있었던 사람일수록 하느님은 더 혹독하게 평가한다.

종교개혁 씨 뿌렸지만 가톨릭 교회에 남아
온건한 중도·중용의 길은 험난하다. 한때 사람들은 에라스무스를 모두 미워했다. 가톨릭 교회는 그가 개신교라는 당시의 ‘이단’과 공유하는 게 너무 많은 게 싫었다. 한때 그의 모든 저작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개신교 측은 종교개혁을 부추긴 에라스무스가 정작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동참하지 않은 게 몹시 섭섭했다. ‘절친’이었던 영국의 정치가 토머스 모어(1478~1535)와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교회에 충성했다. 부패 척결, 미신 타파 등 교회의 개혁도 필요하지만 교회의 일치를 깨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역사의 최종 승자는 보수도 진보도 아닌 중도다. 유럽연합의 학생 교류 프로그램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에라스무스가 이를 입증한다.

에라스무스는 아포리즘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는 대중의 의사소통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으로 라틴어·그리스어 속담을 집대성한 『격언집(Adagia)』(1500)을 저술했다. 그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로는 이 말이 있다. “항상 웃는 것은 어리석다. 전혀 웃지 않는 것은 멍청하다.”

『크리스천 군주 교육론』은 자식을 지도자, CEO, 재상으로 키우려는 부모들과 교육자들이 읽어볼 만한 책이지만 아직 우리말 번역본이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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