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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테마별 고전읽기] 화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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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어느 화폐심리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당한 양의 돈이 있으면 자기가 일상에서 겪는 곤란의 대부분이 해결된다고 믿고 있다. 이수일 같은 심정에서야 '돈이면 다냐'고 따져 물을 수 있겠지만, 가난 때문에 울어야 했던 심순애로서야 돈처럼 절실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사랑을 살 수 있는 건 사랑뿐이라고 외치는 건 신파극 이야기고, 현실에선 "돈만 있으면 늙은 과부에게도 젊은 청혼자들이 줄을 잇는다."(셰익스피어)

하지만 정작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또한 돈이다. 파란 잉크 칠해진 종이조각. 계좌를 통해 움직이는 숫자들. 그걸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돈은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짐멜의 '돈의 철학'(조희연 외 옮김, 한길사)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지만 그 정체는 신비하기 짝이 없는 돈에 대해 가장 폭넓은 이해를 제공하는 고전이다.

짐멜은 화폐를 단순한 경제학적 사물로 다루는 것에 반대한다. "수도원의 설립이 종교적 현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듯 화폐도 경제적 사물이기만 한 게 아니다." 그 피상성을 뚫고 나아가야한다. 화폐에는 근대로 이행하면서 일어난 심층 변화가 새겨져 있다. 그것을 읽어내야 한다. 소위 전문가들은 사실성의 문제에만 주목하지만, 짐멜은 그 현상들에서 얻을 수 있는 의미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근대 문화의 전반을 화폐와 관련짓는 짐멜의 솜씨는 놀랍기 그지없다. 가령 화폐는 근대적 지성의 발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사물들의 보편 척도로의 환원, 감정과 무관한 논리적 전개, 주관성을 배제한 객관적 평가. 화폐의 정신은 근대 과학의 정신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화폐는 주체와 대상의 질적 교감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사랑을 타락시킨 범인이기도 하다. 순간적이고 강렬한, 하지만 곧바로 끝나버리는 사랑. 돈을 지불함으로써 모든 관계를 청산해버리는 매춘은 화폐적 사랑의 전형이다.

화폐는 또한 속도나 시간에 매달리는 근대적 삶의 상징이다. 다양한 재화들을 하나의 화폐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만큼 속도가 증대한다는 이야기다. 화폐사용과 더불어 삶의 회전속도가 빨라지며, 동시에 속도에서 앞서야 화폐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단편적 사례들이 아니다. 짐멜은 맨 끝에 가서 심중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피상성을 뚫고 도달한 근대의 심층, 거기에 있는 것은 '존재의 상대주의'다. 과거를 지배한 세계관이 정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었다면, 근대의 세계관은 철저히 상대적이다. 모든 가치들은 절대 척도가 아니라 상호 교환을 통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끊임없이 교환되고 팔리는 것이 있을 뿐, 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없다. 근대 들어 화폐가 절대적으로 중요해진 것은 그것이 상대성 자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안정감을 주는 것은 언제든 다른 것과 교환될 수 있는 운동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것의 상대화, 불멸하는 것의 죽음, 부동하던 것의 운동. 니체가 기회일지 모른다고 말했던 그 거대한 변화 앞에서 짐멜의 목소리는 결코 밝지 않았다. 신파가 사라진 시대, 그 역시 사랑을 살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라고 믿었던 게 아닐까.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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