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5)「미국의 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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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연전을 나와 즐거움과 활기에 찬 사회활동을 하는 중에도 내 마음은 늘 허전했다. 언제나 떠나지 않는 진실은 신학공부를 하여 사역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어던 소명감 같은 것이었다.
철부지 때부터 누구에게나 목사가 되겠노라고 대답했던 것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박히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관숙사나 목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크신 분으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반드시 신학 공부를 해야한다는 의지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당시의 사정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혼인을 하여 가족을 거느린 나로서는 생계도 문제였고 더구나 학비 조달이 막연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하에서 과연 신학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도 큰 과제였다. 내가 이전 음악과 교원으로 있은 1936년께부터 일제는 조선내의 각급 학교와 교회에 대해 소위 신사참배를 서서히 강제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닌 국민의례라는 궤변을 내세웠는데 더욱 가소로운 것은 국내의 일부 급진적인 교회 지도자가 이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었다.
참배 강요는 먼저 선교사들이 설립한 기독교 계통의「미션·스쿨」로부터 시작되어 차차 교회에까지 확대됐고, 이를 거부하는 교회와 교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특히 당시 평남지사 「야스다께」(안무) 의 참배 강요에 맞서 미 북장노구선교 회실행위원장 「코든·홀드크로프트」(허대전)·「솔타우」(소열도)·「해리·로즈」(노해리) 목사 등이 회동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바야흐로 조선의 교회와 신학은 큰 변란을 겪게 될 참이었다.
당시 우리 나라에는 평양신학교 같은 우수한 교육기관이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한 나머지 일본으로 유학할 것을 결심하고 학비 저축에 나섰다.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것이 조선지도를 만들이 팔아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나라의 글과 말, 그리고 민족혼마저 짓밟힌 일제치하에서 나라의 모양새를 잃어버린 지경이었다. 무슨 거창한 애국을 한다기 보다는 조선인인 내가 조선지도를 만든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뜻있는 사업이라고 믿었다.
마침 미국에서 지도제작법을 공부하고 돌아온 이가 있어서 일은 수월했다. 종로에 있는 예수교 서회 4층 작은 방을 작업장으로 썼다. 1백만 분의 1로 줄인 조선전도에 5천 개소 이상의 지명을 집어넣는 일은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인내와 정성이 필요했다. 11가지 광혈을 그려 넣는 등 당시로서는 꽤나 세밀하고 현대적인 지도였다. 그때 마침 일제는 만주공략을 위한 물자수송 때문에 중앙선을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국에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 예정 선로를 복사할 수 있었다. 일단 원고를 완성하여 「오오사까」로 건너가 색도인쇄에 걸어 2만 장을 찍었다.
나는 의친왕의 추천사를 곁들인 전단광고를 조선일보에 냈다. 의친왕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조선인의 손으로 그린 것이니 집집마다 걸어 놓기를 권한다』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조선지도는 그야말로 불티나게 매진 됐고 덕분에 학비를 조금 모을 수 있었다.
마침내 1937년 신학공부를 하러 현해탄을 건넜다. 내가 입학한 신학교는 장로교 계통의 일본신학사의 일본신학교였다.
「우에무라」(상촌) 선생이 설립한 이 학교는 지금은 일본기독교 신학대학이 됐다. 3년치 학비를 선납하고 기숙사에 들었다.
이 학교에서 나와 함께 신학을 공부한 조선인은 모두 6명이다. 연전에 작고한 연대신학과 교수 지동직 박사와 박영출 목사가 나와 한 반이었고 김종규·이기준·심응섭제 씨도 같이 공부한 사이다.
일찍부터 뜻했던 신학공부였기 때문에 나의 면학은 실로 열심이었다. 생활비를 쪼개어 책을 사보는 것이 최대의 즐거움이었고, 역시 신학의 길을 택한 것을 잘했다고 믿었다. 당시 수백 권의 종교서적을 열심히 읽은 것이 뒤에 두고두고 양식이 됐음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가지 애석한 것은 전쟁통에 수천 권의 책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1939년 2월 나는 뜻밖에도 일제경찰의 검색을 받았다. 전혀 영문도 모른 채로 동경경시청에 끌려가 7개월간 유치장 신세를 졌다.
투옥돼서야 알게 됐지만 죄목은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것과 선교사와 교분이 많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사상이 불온한 조선인이라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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