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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1)미국의 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화여전 음악과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1934년 가을에 나는 뜻밖에도 의친왕 이강전하의 부름을 받았다. 그때 나는 서울연지동 옛 경신학교 운동장 앞집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 배꽃모양의 황실문장을 불인 「포드」승용차가 우리집 앞에 멈춰있었다. 제복을 입은 운전사가 나를 보더니 『창덕궁에서 가 선생님을 모셔오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면서 차에 오르기를 권하는 것이 아닌가.
나를 부르실 까닭이 없는 터이라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되물었다. 운전사의 말인 즉 오늘이 대비마마의 탄신인데, 의친왕께서 부르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짐작이 갔다. 아마도 경성방송국에서 방송되는 내 호담을 듣고 무슨 광대라고 생각해서 잔치자리를 흥겹게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광대도 아닐뿐더러 궁중법도도 모르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을 청하는 것이 좋겠다고 운전사를 타일러 돌려보냈다. 그러나 얼마뒤 운전사가 서찰과 명함한강을 돌고 내집을 다시 찾아왔다. 명함은 분명히 의친왕전하의 것이었다.
따로 보낸 서찰에서 나를 광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윤비마마의 생신을 맞아 왕실근친끼리 조촐한 축하연을 배설했은즉, 「라디오」에서 하던 노래나 이야기로 웃음 잃은 황실에 한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어 달라고 청했다. 나는 『웃음 잃은 황실』이라는 의친왕의 말씀에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비록 황실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나이지만 망국의 한에 사무쳐있는 우리들의 처지가 새삼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곧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황실 자동차에 올랐다. 보통때 같으면 나 같은 백성이야 언감생심, 감히 황실승용차를 탈 생각이나 했을까.
잔치는 창덕궁안 악선재에서 있었다. 의친왕께서 친히 나으셔서 나를 온돌방으로 인도했다. 윤비마마를 상석으로 모시고 7o여명의 근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허리 굽혀 절을 하면서 『불초한 소인을 불러주셔서 황송하옵고 영광스럽기 그지없나이다』고 인사를 올린 뒤 의친왕과 마주 앉았다.
식탁에는 「내프킨」과 은수저, 그리고 「샴페인」잔이 놓였을 뿐 음식은 없었다. 이윽고 하인들이 돌아가며 잔에 포도주를 따르자 모두 대비마마의 만수무강을 빌며 축배를 들었다. 나는 잔을 들었으나 마시지 않고 그냥 내려놓았다.
기독교 신자인 나는 술을 한잔도 입에 댄 일이 없었다. 의친왕이 눈치를 챘는지 나더러 교인이냐고 묻더니, 영어로 무슨 교파냐고 했다. 장로교인이라는 내 대답에 의친왕은 『나는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우리 교파는 천주교와 같이 주초를 금하지 않는다』면서 『술을 못 마시는 벌로 영어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나는 궁중에서 성가를 부르는 것이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아베마리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너 소절쯤 내딴에는 열창하는데 조용히 앉아있던 의친왕은 슬그머니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더니 노래를 그만 부르라고 손을 내저었다.
의친왕은 『제발 그 노래는 그만두고 다른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몰랐고 영어노래를 많이 알지 못해 이번에는 흑인영가『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의친왕은 식탁을 치더니 『아이 윌킬 유 에스 오 비…』 (이놈의 자식, 죽여버릴테다』면서 느닷없이 격분해 했다.
나는 도대체 곡절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펄썩 주저앉으며 『왕자의 손에 죽으면 영광이겠으나 무슨 연유인지 알고나 죽었으면 좋을까 하나이다』고 말씀드렸다.
의친왕은 정말로 죽겠다고 목을 들이대는 통에 정신을 차렸는지 얼른 『자, 오늘은 대비마마의 생신인데 다시 축배를 들도록 하자』고 화재를 돌렸다. 나는 다음 기회에 까닭을 알려 주겠다는 의친왕의 말씀에 따르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때 문밖에서 하인들이 『상드리랍시으』라고 아뢰었다. 시계를 보니 밤 9시가 지나고 있었다. 궁중 잔치에서는 식사가 이렇게 늦나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밖에서 『곁들이납시오』고 묻는다. 궁중범절에 서툰 나는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만 비빔국수가 들어왔다. 다음에 중국요리·일본요리·서양요리가 들어왔는데 여러가지 요리를 한 장에 차리는 것을 곁들인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자정이 넘도록 5o여종의 궁중요리가 잇달았으나 처음 몇가지외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물리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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