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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힘 있을 때 나누는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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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남태평양의 어느 작은 섬이었던 듯하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원주민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눈길이 멎었다. 조각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잡아온 물고기를 분배하는 장면이었다. 어부는 세 사람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물고기를 세 무더기로 나누었다. 아주 신중하게, 큰 고기와 잔챙이들을 적당히 섞어 3등분했다. 그런 다음 나머지 두 명이 순서를 정해 한 무더기씩 차지했다. 처음에 물고기를 나눈 원주민의 몫은 마지막에 남은 세 번째 무더기였다. 그들 사회의 규칙이라 했다. 자원을 분배하는 자와 선택의 우선권을 가진 자가 다르다. 자기가 손해 보지 않으려면 최대한 똑같이 나누어야 하고, 나눈 자보다 먼저 선택할 수 있으므로 어떻게 나누든 불만이 없다. 잘못 나누면 먼저 선택하는 자가 오히려 득을 본다. 이해관계의 절묘한 균형점이다.

 굳이 남태평양까지 갈 것도 없이, 자기 가정에서 이런 지혜를 발휘한다는 사람도 보았다. 두 아이가 케이크를 놓고 서로 많이 먹겠다며 다툰다 치자. 한 아이에게 케이크를 둘로 가르라고 시킨다. 먼저 선택할 권리는 다른 아이에게 부여한다. 케이크를 자르는 동작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뒤늦게 남의 떡이 커 보일 수야 있지만, 자기가 먼저 선택한 이상 불만을 내비치기 어렵다. 물론 세상사 모두를 이런 단순한 규칙으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남태평양 원주민만 하더라도, 집에 가족이 많거나 병으로 배를 타지 못한 이웃 주민 등 고려할 다른 요소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세세하게 보정(補正)할 대목이지 근본 원리는 어디서나 통한다. 가장 나쁜 것은 자기가 나누고 선택의 우선권도 자기가 갖겠다고 우기는 것, 또는 일단 나눈 것을 없던 일로 하고 다시 나누자고 덤벼드는 경우다.

 필자는 교육감 직선제를 마뜩잖게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마자 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나 새누리당에서 직선제 폐지론이 나오는 걸 보면 이건 아니라는 느낌이다. 명분보다 몰염치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힘 있을 때, 아니면 최소한 평상시에 문제 제기를 했어야 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 당선자와 원희룡 제주도지사 당선자가 야당에 내민 손길에서는 정반대로 신선함이 감지된다. 남 당선자는 야당 사람을 사회통합 부지사로 삼겠다고 했다. 원 당선자는 패배한 야당 경쟁자에게 지사직 인수위원장 자리를 제의했다. 야권에는 야당 고유의 견제 역할이 필요하다거나 제안 자체를 못 믿겠다는 반응이 있는 모양이다. 일종의 ‘정치 쇼’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정치 쇼라면 열번 백번 더 등장해도 반갑다. 외국 노래(‘The Winner Takes It All’) 제목 그대로, 승자독식 풍토가 오래 지속돼 중간지대 없는 싸움만 벌이는 정치판에 신물 난 지 오래니까.

 예를 들어 KBS의 새 사장 임명과 지배구조 개편에서부터 ‘물고기 나누기’ 방식을 실천해 보면 어떨까 싶다. KBS 사장은 KBS 이사회의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사회는 여당 측 인사가 다수다. 지금 제도로는 어느 쪽이 정권을 잡든 여당 입김에 좌우될 수밖에 없고, 과거 사례를 보면 실제로 그랬다. 지금 야당은 여당을 비난하지만 속으로는 “우리가 정권을 잡기만 하면”이라고 셈하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제도 개혁을 이루지 못한 것 아닌가 말이다. 먼저 누구나 어느 정도 수긍할 인사를 새 사장으로 삼고, 지배구조에 관한 새로운 게임의 룰을 만들어 야당에 선택권을 던져 보자.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적용할 만하다고 판단되면 야당도 동의할 것이다. 일부 구성원의 고질적인 정파성을 견제할 장치만 가미한다면 만날 ‘어용’과 ‘노영(勞營)’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대통령의 공약사항이기도 하다.

 권력과 자원의 재분배가 정치의 중요한 기능이라면, 분배하는 손길은 섬세하고도 통찰력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소외된 세력이나 잠재권력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대한민국에는 좌와 우만 있는 게 아니다. 좌우 모두 ‘앞’을 보아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 소통해야 한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해경 등 정부 실패와 청해진해운으로 대표되는 시장 실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요즘이 특히 그렇다. 정부·시장 실패에 이어 소통마저 실패한다면 ‘세월호 이후’마저 암담해진다. 어제 문창극씨가 새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것을 신호로 내각·청와대 개편의 물꼬가 트였다. 총리 후보자의 경우 종래의 ‘수첩 인사’에서 벗어난 의미가 크다고 한다. 나머지 인사도 넓은 시야에서 진행되길 기대한다. 힘 있는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권력은 종종 나누면 더 커지는데, 지금이 그런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