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한 납세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아홉개나 되는 세법이 개정되었는데, 신문·방송 할 것 없이 약속이나 한듯 근로소득세 공제인상을 머리로 뽑았다. 납세인원으로나 국민의 관심도로 보아 의당 그렇게 될 자리였다. 제목결정의 민주화가 자연스레 이루어 진 셈이다.
신문을 받아든 수많은 봉급자들은 열심히 자기세금이 얼마나 줄었나 계산해 본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실망한다 『겨우 이거야.』
정부·여당은 설명한다. 이번 세법개정은 중산층근로자의 부담을 줄이고 고소득자에 중과하여….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진부한 느낌조차 주는 세법개정의 변은 이미 공신력을 잃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납세자들은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납세자의 대표들이 모인 국회에서는 설사 우리편을 들어주겠지-.
그러나 과연 어떨지. 여당간부들은 미리부터 쐐기를 박는다. 『이번 세법개정은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럴 바에야 국회는 왜 열어.』 야당의 볼멘 항의가 얼마나 먹혀들지. 궁금한 것은 월급장이뿐 아니다.
막무가내의 인정과세로 맥을 놓고 있는 많은 영세사업자들도 부가세가 어떻게 좀 달라지지 않을까 잔뜩 기다린다. 자, 우리의 선량들은 어떻게 이 선량한 납세자들에게 보답할는지.
세금을 제때에, 어김없이 내는 일은 언필칭 「신성한」의무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이 신성한 의무의 범위를 지정하는 세법개정도, 그렇게 해서 거둬들인 세금을 쓰는 일도 「신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논리상 이상할 게 없다.
수주 전 미국 서부 어떤 주에서는 세금을 신성하게 쓰지 않는다고 주민들이 이 「신성한」의무를 벗어버렸다. 그래서 청소원과 경찰관이 예산부족으로 해고되고 집 앞에는 쓰레기가 쌓이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런 부류의 해묵은 소동은 요컨대 정부가 꼬박꼬박 거둬낸 세금을 국민을 위해 쓰지 않든가, 너무 많이 거두든가 둘 중의 하나 때문에 빚어진다.
그래서 정부가 일을 많이 하고 싶어도 납세자들과 상의하는 자세가 긴요하다. 이런 상의가 제대로 무리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닐까. <김영하 경제부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