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짐한 수확…바다 밑 신비 캐기 3년-풀이는 이제부터…신안 유물 "6000년의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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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안군 지도 앞 바다에서 6백여년전 중국 원나라의 유물을 건져내는 작업이 3년만에 일단락됐다. 캄캄한 바다 밑을 더듬어 한점씩 건져 올린 것이 무려 1만2천여점을 넘었으니 대견한 작업을 해냈다.

<무수히 깔린 동전 포기>
물속 20m면 능숙한 잠수사도 한 두번 호흡을 조절해야 수압을 견디는 깊이. 더구나 이곳 바다는 밀물·썰물의 험한 물목이어서 장마철 급류와 같은 6∼10「노트」의 물살이다. 그래서 하루 한번 정조시간에만 재빨리 움직여야 했다. 여기 동원된 해군 잠수사가 매일 60명. 76년10월이래 4차례에 걸쳐 총 l백20여 일간 무수한 자맥질을 되풀이해 왔다.
건져낸 유물은 90% 이상이 도자기다. 그리고 금속제품이 3백62점, 석제품이 15점, 기타 4백41점이다. 녹슬어 엉겨붙은 동전 덩어리는 수십만 점이 되겠지만 아예 계산에 넣지 않았다.
아직도 배 안에는 동전이 무수히 깔려있는데 쓸어 담을 방법이 없어 단념해 버렸다는 조사단의 보고다.
이번 4차 작업에선 선체 안의 유물은 물론 5∼10m 주변까지 샅샅이 더듬어 유물 인양을 마무리 지었다. 심지어 소줏병·강통·쇠갈고리·구두짝 등 어쩌면 도굴범들이 남긴 물건들까지 모두 올라왔다는 뒷소식이다. 또 선미에선 사람의 두개골이 두개나 발견됐다.
당초 유물을 다 건져내면 선체가 떠오르면서 바스러지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선체 안엔 그대로 1·5m 깊이로 뻘흙이 가득 차있다고 한다. 가까스로 재어본 결과 배의 길이는 28·6m에 폭이 8m. 14세기 목선으로선 거대한 무역선이다. 갑판 이상은 부식돼 흔적도 없으므로 돛이 몇 개였는지는 알 수 없다.
금년 여름작업에서 5천여점의 인양유물 중 9점의 일본 것이 섞여 나와 막바지 「피크」를 이루었다. 1백%가 중국제의 화물인데 하필 9점만 섞여있는 것일까. 한국의 고려청자 3점은 12세기 것이므로 아예 2백년쯤 시대의 격차가 있지만 일본 것은 14세기 「가마꾸라」시대 후기 특징을 지닌 물건들이다.
유물 내용도 골고루 갖춰져 있다.

<흑칠벼루 등은 귀사료>
칠회추초문주칠완 3개 한벌, 흑칠벼루 1개, 해상신사도문 및 학문동경 3개, 「세또·야끼」라 일컫는 청자병 l개, 긴칼의 부속인 동제 칼코 l개 등이 모두 배 안에서 인양됐다. 배를 건져 올린다면 또 다른 물건이 나타날지 모르지만 이 4종만으로도 온갖 상상을 가능케 한다.
이들 일본제품은 무역상의 화물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침몰선의 전체 화물로 봐서는 응당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일 수밖에 없다.
항주만을 출항해서 일본「규우슈」의 서북단 오도열도를 향해 항해 중이었으리라. 도중에 선체에 고장이 생겼거나 폭풍우를 만나 한반도의 해안으로 표류돼오지 않았을까.
l330년께는 고려말기의 충숙왕 때다. 고려왕조는 원나라의 수탈로 내정이 들볶일 때이고 밖으로는 왜구의 노략질이 밀어닥치는 초기에 해당된다. 왜구는 호남 해안지방을 비롯하여 개경(개성의 고려 때 이름) 가까이 까지 오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그때마다 급히 군사를 보내어 물리쳐내기에 고심 참담했다.

<중국 떠나 일본 가던 배>
조난 당한 무역선은 일본 배로 오인돼 고려군사에 의해 끝내 격침됐는지도 모른다.
만약 원나라 배임이 확인됐다면 당시의 한중 국교상 구제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왜구라면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상은 이번 발견된 유물이 한층 뒷받침 해준다. 가령 3개의 일본제 청동거울 중 특히 해상신사도문 동경은 상품이기에 앞서 일본인들 사이의 종교적 신체 그것이다.
신을 상징하는 주체로서 신궁 깊숙이 모시는 신앙물이다. 이런 신체로서의 성격은 일본에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거기 양각된 「이쓰꾸시마·진쟈」의 실정은 바로 해상 수호신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만하다. 청자매병은 그에 봉납하는 주병이고 주칠의 식기 역시 그런 의식용이라 해석됨직하다.

<일본제 9점은 종교용>
그렇다면 비록 배는 중국배일 망정 선원은 일본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선실에다 이른바 「가미다나」를 모셨던 자취가 이번 발견된 일본유물이 아닐까하는 추정이다.
6백여년전의 비밀을 해명한다는 것은 결코 쉽게 속단해선 안된다. 하지만 가능한 한 해명해야하는 것이 고고학이요 발굴이다.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인 느낌이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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