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 <제자 김동익> 제59회 함춘원 시절 (11) 장안의 명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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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금도 그렇지만 서양의학이 이제 막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우리한국인 의사가 배출, 앞을 다투어 개업가에 뛰어들 당시 장안에는 각과의 명의에 대한 화재가 끊이질 않았다.
내과하면 심호섭·임명재·고영순씨가, 외과하면 조한성·박창훈·정구충·백인제씨 등이 꼽혔다.
정구충 박사(83)를 빼고는 세분이 모두 나의 경의전 선배다.
정 박사는 지금도 우리 의료계의 원로로서, 그리고 산 증인으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맹 활약중이신데 일본 대판의대를 졸업하고(1921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종로3가에 정구충 외과의원을 개업해서 대성황을 이룬 것으로 기억된다.
욋과전문이라는 간판을 처음으로 단 이는 아마도 조한성씨가 아닌가 싶다. 내가 대학병원 「이와이」냇과에서 한창 연구와 진료에 열중하던 1929년 께다.
내 기억으로는 욋과의사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는 박창훈씨(19년 경의전 졸)다.
박 선배는 내가 경의전을 졸업한 1924년4월 나와 함께 병리학교실에 들어갔는데 그의 애당초 의도는 병리학을 전공하기보다는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임상에서 얻기 어려운 조 교수직을 일단 얻었다가 장래 욋과로 옮길 생각이었던 듯 싶다.
어떻든 나중에 대학병원 욋과교실에 옮겨간 그는 본래 재사 형인데다 워낙 열심이었기 때문에 당시「시가」(지하결)교장의 총애를 받았었다.
27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박 선배는 서울 낙원동에 박창훈 욋과를 개업해서 명의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치질의 권위자인 그에게 수술을 받으려는 치질환자들이 병원을 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와는 친분이 두터워서 오랫동안 왕래가 잦았는데 나를 만날 때마다 가정적으로 부럽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6·25때 부산피난시절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나의 선배가운데 욋과의사로서 가장 명성을 떨친 이는 백린제씨 일 것 같다.
무엇보다도 백 선배는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했던 경의전 욋과 교수가 되었던 것이다.
3·1만세사건으로 졸업이 늦어진(21년) 백 선배는 28년 일본동경제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우리나라 의사로서는 처음으로 경의전의 임상교수가 됨으로써 우리 후배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l928년4월 조선총독부의원은 경성제대 대학병원으로 바뀌었고 경의전 부속의원은 소격동에 새로이 지어진 건물로 옮겨갔는데 백 선배는 이 경의전 부속의원의 초대 욋과 교수로 발탁된 것이다.
또 그는 유명한 재단법인 백병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지금 서울 중구 저동에 자리잡고 있는 백병원은 원래 조선총독부의원「우에무라」욋과의 「우에무라」씨가 개업하던 욋과 의원이었는데 1935년께「우에무라」씨가 그의 제자가운데 재질이 가장 뛰어난 백린제씨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듣기로는 그 병원자리가 한일합방 때의 공으로 이완용 등과 함께 귀족이 된 조중응의 저택자리라고 한다.
어떻든 백 선배는 해방 후 41년에 그만두었던 경의전 욋과 교수직에 복귀, 부속병원장에 취임했다가 후년 국대에는 관여치 않고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해서 성업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그의 장자 백낙조 박사(독일서 욋과대학 졸·현 백병원이사장)와 조카 백낙환 박사(51년 서울대의대 졸·현 백병원장)가 유업을 계승, 초현대식 종합병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한편 일제말기에 해산 당한 서울시 의사회를 재조직해서 회장직을 맡고 47년에 대한외과학회를 창립, 초대회장으로 헌신했던 백 선배의 공적도 빼놓을 수 없다.
6·25 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길 없지만 살아 계신다면 올해 81세인 백 선배의 그 활기찬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산부인과의사로서는 경의전 출신보다「세브란스」의전 출신인 신필호씨(14년「세브란스」졸)가 단연 독보적 존재였다.
그의 아우 웅호(32년 경성제대의학부 졸)와 아들 한수(42년 졸)는 함춘원 출신으로 모두 산부인과를 전공했는데 특히 신한수씨는 서울의대산부인과 교수를 지내다가 작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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