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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파가니니 고난도 연주가 유전자질환 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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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툴루즈 로트레크의 ‘물랭루즈.’ 척추장애 등의 유전 질환을 앓았던 그는 종종 특이한 관점에서 스케치를 하거나 채색을 했다. [중앙포토]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해나무, 508쪽, 2만원

현대과학의 최전선인 유전자 연구. DNA니, 염기서열이니 어려운 용어가 많다. 물리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과학저술가로 활동하는 지은이는 유전자의 비밀스런 세계를 알기 쉽게 풀어낸다. 사랑·운명·감정·역사·가정사·예술 등 인문학적 이야기와 유전자의 과학을 먹기 좋게 버무렸다.

 예로 19세기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를 보자. 그는 손가락을 놀라울 정도로 뒤로 멀리 구부릴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재주를 이용해 남들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고난도 기교를 보여줄 수 있었다. 이런 현란한 연주가 흥행에도 성공하자 그는 오로지 자신만이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주로 작곡했다. 당시 그토록 인기였던 작곡가 파가니니의 곡이 오늘날엔 별로 연주되지 않는 이유다.

 지은이는 파가니니의 놀라운 재주를 유전자 이상 질환에서 찾는다. 손가락 상태를 볼 때 파가니니는 뼈를 단단하게 해주는 콜라겐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엘럿-단로스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해당 질환이 바이올리니스트로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됐지만 약한 피부, 허약한 폐, 쉬 피로해지는 근육 같은 건강이상의 원인이 됐을 것으로 본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이라는 피아노곡을 작곡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도 주목 대상이다. 손을 쫙 펼치면 30㎝정도여서 피아노 연주에 유리했는데, 이 역시 유전자 이상 질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지은이의 추정이다. 키가 크고 사지가 길며 심장·혈관 등에 이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마르팡 증후군으로 의심된다는 것이다. 긴 손가락으로만 칠 수 있는 고난도 곡을 작곡하고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림과 조각에서 사마귀처럼 길쭉하게 묘사된 고대 이집트 파라오 아크나톤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도 이 질환으로 고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지은이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일축한다.

 작곡가 슈만은 오른쪽 중지를 구부리기 어려운 국소성 근이상이라는 유전자 질환으로 피아니스트를 계속 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작곡에만 전념했다. 문제의 손가락을 쓰지 않는 곡도 하나 만들었는데 이는 자신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물랭루즈’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는 또 어떤가. 그는 척추장애와 작은 키로 고생했는데, 이는 가문의 토지를 대를 이어 지키기 위해 사촌끼리 근친혼을 하는 바람에 생긴 유전자 결함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심지어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친자매였다고 한다. 하지만 키가 작았던 로트레크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의 독특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근친혼은 1000년 이상 내려온 합스부르크 왕실의 남자를 허약하고 아둔하게 해 제국이 무너지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영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 살던 킴 픽(1951~2009)은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 복잡하고 발음도 어렵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이름을 순서대로 외우는 것은 물론 역사·지리, 오페라 등 클래식 음악, 셰익스피어, 성경을 비롯한 서양문명의 모든 것을 외우는 살아있는 백과사전이었다. 자신을 모델로 만든 영화 ‘레인맨’도 대사와 장면을 사진처럼 외웠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암기한 책 9000권에 들어있는 어떤 문장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구글을 뺨치는 수준이다. 옛날 날씨나 미국 우편번호처럼 자잘한 것도 다 머릿속에 넣고 다녔다.

 하지만 그는 혼자서는 옷의 단추도 채우지 못했으며 집안 식기가 어디 있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IQ를 검사했더니 87로 나왔다. 자폐를 비롯한 뇌기능장애를 앓으면서 한편으로 엄청난 능력을 지닌 이런 증상을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한다. 이 증후군을 앓는 사람 중 한편으로는 천재이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백치를 뜻하는 ‘이디오사방(idiot savant)’이 있는데 픽은 그보다 능력이 더욱 뛰어난 ‘메가사방(mega savant)’에 해당한다는 게 지은이의 판단이다.

 이 놀라운 능력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의사들은 물론 미 우주항공국(NASA)까지 나서 그의 뇌를 촬영했다. 하지만 좌우의 뇌가 서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신경세포들이 고루 발달하지 못하는 희귀 유전질환인 RF증후군을 앓는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이다. 유전자에 대해 인간은 아직 이 정도밖에 모른다.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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