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294)제59화 함춘원 시절(5)|<제자 김동익>김동익|구보망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국 13도에서 모여든 우리를 40여명은 3·1만세사건으로 친구를 잃기도 하고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친구도 생기는 등 얼룩진 학창생활을 해야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는 오히려 행복한 편이었다.
조선총독부 의원과 경성의학 전문학교에는 옆구리에 일본도를 찬 오만스런 군의들이 차차 자취를 감추고 대신「시가」(지하)교수가 병원장과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저명한 일인의 학자들이 교수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시가」교수는 유명한 이질균을 발견한 세계적 대학자였다.
한일합방 이후 3·1운동을 비롯해서 우리 민족의 저항이 뜻밖에 강해지자 일제는 그들의 식민정책의 방향을 군사적 탄압에서 문학적 회유로 바꾸었다.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 강습소가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뀌고 군화소리가 요란했던 함춘원이 대학자들의 연구분위기로 휩싸이게 된 것도 바로 이 같은 배경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떻든 함춘원을 넘쳐흐르는「아카데믹」한 공기는 우리들 젊은 예비의학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오욕칠정의 주인공인 인간의 생로병사를 다루는 의학은 신비와 경이의 학문이었다.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다시 한번 졸업「앨범」의 머리말을 들여다보니 당시 우리의 가슴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1만3천여리나 되는 폐허의 재맛은 누구의 입김으로 새 문화가 일터이며, 2천만의 황량한 심인을 누구의 손으로 개척할 터이냐.
우리의 동맥 속에는 선홍색의 피가 뛰놀고 우리의 도공 안에는 형형한 광휘가 번쩍이고 우리의 폐장에는 씩씩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철자법은 현재 것으로 고쳤음)
게다가 당시 경의전 생들은 전국 각지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유수한 집안의 자제들 가운데서 뽑혀 왔기 때문에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심이 대단했다.
밤늦게까지 실험실을 떠나지 않았고 병원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동기는 다른 기 졸업생에 비해 의학박사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또한 의학계 각 분야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동기가 많다.
이렇듯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 우리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행복한 편이었고 가르치는 교수들도 비록 일인이기는 하나 비교적 학자답게 열심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침략자의 근성을 드러내고 민족적 편견으로 우리들을 구박한 일인교수도 없지 않다. 그대표적 인물이 이른바「구보망언」으로 함춘원을 벌집처럼 쑤셔놓은「구보·다께시」교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욋과 대학생들의 첫 관문은 해부학이다. 이 난관을 극복하지 못해 의사가 되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다.
워낙 까다롭고 어렵기 때문에 해부학의 관문을 뚫지 못하고 그만 의학을 포기해 버리는 예가 많은 것이다.
「구보」교수는 바로 이 해부학 교실의 주임교수였는데 학생들을 들들 볶는 것이 그의 취미인양 잠시도 우리를 가만 두지 않았다.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학생실습용 두개골이 하나 분실된 것이다.
시체를 구하기 힘든 당시인지라 두개골은 더욱 귀했다.
『조선인은 도둑질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훔쳐간 두개골을 내 놓아라.』
강의 도중「구보」교수는 이렇게 서슴없이 한국 학생들에게 소리쳤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우리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의 망언에 대해 항의했다. 함춘원은 우리들의 분노로 술렁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그 전에『두개골의 구조로 보아 조선인은 야만인이다』는 망언을 해 선배들이「데모」를 벌이고「스트라이크」까지 일으킨「구보망언」사건의 표적인물이기도 했으니 우리들의 감정은 격렬했다.
함춘원의 공기가 너무 험악해지자「구보」교수는 두개골이 없어져서 화가 나 잘못 말했다고 우리들 앞에서 사과했다.
그리고 공부에 열중하다 보면 두개골도 가져갈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우리들을 달래기에 급급했다. 그의 사과하는 태도가 워낙 진지했기 때문에 우리는 곧 강의실로 돌아갔다.
확실히 기억할 수 없으나 그때 나는 김명학씨(욋과의사)와 함께 학생대표로「구보」교수를 만나 사건을 마무리 지었던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구보」교수는 이 사건으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정신과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는데 그로서는 당연한 업보이리라.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