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언론의 압력의 논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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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미 양국간에 미 의회「로비·스캔들」에 대한 김동조 전 주미대사의 증언문제가 숨가쁘게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미 의회 측이 「로비·스캔들」에 대해 그 나름의 관련혐의를 잡고 있는 사람에 대한 증언을 들으려는 건 이해될 만도 하다.
단지 증언을 들을 대상인물이 면책특권을 지닌 외교관이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미묘할 뿐이다.
한국과 미국이 모두 가입하고 있는 외교관계에 관한 「빈」협정에 의해 외교관은 일체의 조사나 증언요구로부터 면제를 향유하도록 되어 있다.
때문에 외교관의 면책특권에 관한 사항은 접수국이 포기를 요구해서도 안되고 파견국이 이를 수락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라 하여 이를 강요한다면 국제정치에서 「도덕」을 내세우는 미국의 기본입장에 배치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최근에 와서 일부 미국언론은 김 대사증언압력을 가중하면서 동맹국이므로 협조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우고 있다.
확실히 동맹국사이는 남다른 협조가 따라야하는 것도 사실이다. 「로비」활동의 장본인인 박동선씨의 도미증언에 우리측이 협조한 것만 해도 국제법이나 국내법상 어떤 의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한미관계란 특수관계에 따른 전적인 우리의 대미협조 성의에 바탕을 두었었다.
김 전 대사의 증언문제에 있어서도 한미간의 우호관계는 중요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동맹국간의 협조관계만으로 온갖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맹국간에도 상호 존중하고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빈」협약에 의한 외교관의 특권·면제 같은 규칙은 동맹국간이라고 해서 적당히 얼버무릴 성질이 아니다.
만일 전 세계 문명국이 모두 승인하는 이러한 규칙이 무시된 다면 이는 국제사회에 「협조」가 아닌 「굴종」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따라서 동맹국이란 관계는 서로 지켜야할 규칙 안에서 합리적 해결방안을 성의껏 모색하게 하는 유인은 될지언정 규칙자체를 무시한 굴종마저 합리화할 수는 없다.
동맹국이라 해서 굴종을 요구한다면 이는 동맹국과 식민지를 혼동하는 행동이다.
더구나 김 전 대사가 증언을 하지 않으면 30일 이내에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일부 언론인의 주장에 이르러선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주한미군의 한국안보에 대한 기여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지만, 우리만을 위해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
미군의 한국주둔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세계전략과 국가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압력의 논리는 우리가 협조할 수 있는 여지를 막을 뿐이다.
PL480차관 제공을 거부한 미 하원의 조처는 이미 우리측의 융통성발휘를 대폭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아뭏든 김 전 대사의 문제는 「빈」협약의 테두리를 벗어난 해결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미국 측도 압력이 아닌 협력의 차원에서 문제해결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양측이 한미우호관계의 심화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 어려운 문제를 극복해 내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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