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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용직<서울대교수·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 얼맛동안 불황의 늪지대를 헤매어 온 듯 작금 우리 시는 줄기차게 독자의 외면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대세를 비웃어낼 정도로 훌륭한 작품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노상 우리는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젠가 우리 앞에 「헤라클레스」의 그림자를 던지는 대시인이 출현하리라는 기대와 상관되는 것이다. 우리는 글을 통해 우리 시의 성가가 공전의 것이 되기 바란다.
하지만 이달에는 우리 앞에 지루한 장마의 종식을 알리는 예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숫자로 보면 지금 우리 시단에는 많은 사람들이 활약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평생을 바쳐서 시를 써온 분도 있다. 그리고 한때는 참신한 바람을 일으킨 작품을 써온 분들도 적지 않다. 또 날마다 새 얼굴이 등장하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가 조금씩 그러면서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우선 오랜 시력을 지닌 분들에는 젊음이 발산할 수 있는 패기가 없다. 대체로 그들은 익숙한 말들을 골라 큰 실수 없는 작품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들의 채색은 우리 시의 새로운 지평을 타개할 만큼 강하지 못한 것이다. 중견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성립된다. 어느 때고 시를 써서 호구의 길이 섰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듣지 못했다.
그런 점 우리는 외롭고 후미진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른 중견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어쩌랴. 현실에서 얻는 좌절·방황·고난과 시는 전혀 별도의 것이다. 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신인들에게는 더욱 큰 문제가 있다.
신인이란 물론 새로운 존재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형태와 구조, 그리고 말들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것은 끝없는 자기부정과 그를 통한 창조성의 확보를 통해서만 구축되는 것이다.
창조란 낱말 하나하나, 심지어는 「피리어드」 「커머」하나에까지 적용되어야 하는 개념임을 명기해야겠다.
그럼에도 요즘 우리 주변에 등장하는 신인 가운데는 더러 비슷한 말, 엇비슷한 내용의 시를 보여 주는 예가 있는 것 같다. 하기야 비슷한 목소리가 모이면 하나의 유기가 형성된다. 그것으로 우리는 이 시대의 한 시적 경향을 읽을 수는 있게 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것은 현상유지가 될 뿐이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 답답한 풍경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해서는 에누리없는 창조, 혁신이 이루어져야한다. 그런데 시의 혁신은 눈치보기나 아류의 정신으로 획득될 수는 없는 차원이다. 그보다는 제나름의 세계구축만이 그것을 가능케 해줄 것이다.
이 달에 발표된 여러 작품 가운데서 그래도 우리는 정현종과 강우식·정호승 등의 작품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문예중앙」 여름호에 실린 『종이 꽃 피도다』에서 정현종은 <꽃에는 비 풀잎에는 바람 우리한테는 너무한 희망 내려주시도다 하느님>이란 부분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제3행이다. 꽃과 풀에 비와 바람을 대비시키듯 인간인 우리에게 희망을 끌어 붙인 것부터가 재미있는 생각이지만 특히 그 앞에 <너무한>이란 말을 쓴 것이 기발하다.
알맞은 말을 제자리에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작품은 간과될 수 없다. 강우식의 『그리움』은 아주 조소주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실체가 없는 그리움이 여인으로 제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생생한 표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문학과 지성」에 재수록된 『혼혈아에게』를 통해 정호승은 상당히 밀도있는 언어를 보여 주었다. <전쟁은 가고 나룻배에 피난민을 실어 나르던 그 늙은 뱃사공은 어디 갔을까 학도병 따라 가던 가랑잎 같이 떠나려는 아가야>. 여기서 가랑잎이 유추해내는 것은 산화한 학도병의 「이미지」다. 그것을 적절히 이끌어 들여 객관적 상관물화하고 있는 점, 이 작품은 당연히 주목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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