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컬」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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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초교파 기독교협의회」주최로 지난 6일 개최된 국제「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세미나」는 「크리스천」들뿐 아니라 비기독교 일반인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사가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의 수는 신구교 합쳐서 이미 7백여만명에 이르러, 그러한 다수집단이 벌이는 내부적 일치운동은 바로 자체적인 의미뿐 아니라 사회적인 의의까지도 띠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이번 국제「세미나」를 계기로, 앞으로 신구기독교 제파가 보다 활발한 대화를 통해 기독교적 복음의 구현사업에 한층 정진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기독교 제파의 내부일치운동에 대해 이렇듯 외부로부터의 기대를 피력해두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기독교 제파가 만약 수백년래의 내부적 갈등과 대립을 지양하여 그 비생산적인 「에너지」소산을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집중시킬 때 그것은 범사회적·범인류적인 이득으로 귀결될 것이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교파와 교회제도에 따라 교리가 서로 다르고 의식이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또 교회가 그처럼 수많은 종파로 갈라진 데에는 그만한 사회적 배경과 역사적 요인이 작용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교리상 차이와 이해불일치 때문에 신앙인 본래의 사명수행이 장애를 받는대서야 이를 어찌 참 신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 본래의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에 귀일한다고 한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 행복한 자와 버림받은 자의 단절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을 형제적인 「사랑의 공동체」로 맞아들이자는 것이, 이를테면 기독교도들의 복음적 사명인 것이다.
이 사명은 교파에 따른 교리상의 차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개방적인 마음과 선의만 있으면 실천할 수 있고 또 실천해야 할 일이다. 범인류적인 공통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토마스·아퀴나스」면 어떻고, 「루터」·「캘빈」이면 어떻다는 것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배타적인 교리와 제도 때문에 따른 교파들을 무조건 이단시하고 적대했던 과거의 역사는 분명 극복되지 않으면 안될 유산이었다.
다행히 오늘의 뜻 있는 교회지도자들은 이제 분열보다는 일치에의 사명과 당위성을 절감하여 『만유를 통일하는 신』의 개념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 세계기독교 사상 커다란 의미를 갖는 움직임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일치운동은 반드시 몇 개의 기본적인 원칙에 충실해야만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
「에큐메니컬」운동은 우선 교리나 교회활동의 단일화나 획일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리의 해석이나 의식은 각 교파 고유의 특수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다만 보편적인 인류에 실천방식에 대한 일정한 「이슈」를 중심으로 제휴를 확대해 나가면 될 것이라 본다.
「에큐메니컬」운동은 또한 추상적 교리논쟁보다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에 대해 보다 큰 복음적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폭력과 전쟁의 문제, 각종 재난과 고통의 문제, 많은 갈등과 증악의 문제…등, 기독교적인 공통의 복음화 대상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공동의 관심과 협력이야말로 「일치」에의 노력이 현실적으로 일치될 수 있는 최선의 장이 아닐까 여겨진다. 모처럼 제고된 초 교파적 대화기운에 착실한 성숙이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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