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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궁의 수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태양왕이라 불리던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완성시키는데는 30년 이상이 걸렸다.
건축가「르보」는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고, 그 뒤를 이어 「망사르」가 겨우 완성시켰다.
그것은 과연 태양왕이 바라던 『전 고미증유로 장려한 궁전』이었다. 여기서 「라신」과 「몰리에르」의 연극이 왕을 감동시키고, 「쿠프랭」의 음악이 성장의 귀부인들을 매료시켰다.
「베르사유」 궁전의 서쪽 정원에 면한 『거울의 방』 천장에는 17세기의 화가 「르블랑」의 장식화가 박혀 있고 그 밑에서 보불 평화 조약, 「베르사유」 조약 등이 맺어지기도 했다.
『거울의 방』 남쪽에는 『평화의 살롱』이 있고 북쪽에는 『전쟁의 살롱』이 있다. 여기엔 「르블랑」이 그린 「프랑스」의 전승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이 방이 지난 26일 「브레타뉴」 혁명 해방군이라는 과격파들에 의해 폭파되었다.
외신 보도에 의하면 「레브레」가 그렸다는 <「레존드넬」 동장을 수여하는 「나폴레옹 상」>도 결딴이 났다고 한다.
「베르사유」 궁전은 수난도 많았다. 「프랑스」 혁명 때에는 이웃 농민들이 침입하여 소장품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약탈해 갔었다. 이때 잃은 그림들은 그후 「프랑스」 정부가 다시 사들여야했다.
1870년에는 「프로시아」군의 사령부가 되어 1년 가까이 군화에 짓밟혀야했다. 2차 대전 때에도 잠시 연합군 총사령부가 된 적이 있었다.
이 모두 난리를 용케 모면한 그림들이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브레타뉴」의 「프랑스」사감들에게 결딴난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신화가 담긴 「브레타뉴」의 숲을 「피에르·로티」와 「샤토브리앙」은 매우 사랑했었다. 「고갱」은 「파리」의 문명으로부터 탈출을 꾀할 때마다 「브레타뉴」에 갔다. 젊은 시절의 「앙드레·지드」도 「괴테」의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손에 들고 「브레타뉴」의 들을 찾았었다. 「빅토르·위고」는 소설 『93년』에서 「브레타뉴」인을 평하기를 『미개하고 괴팍스러우나 소박한 사람들』이라 했다.
이런 「브레타뉴」 지방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특이한 풍속이며 언어를 살리겠다고 외치면서 「문명」의 「파리」에 반항하고, 독립 운동을 꾀하는 심정도 알만은 하다.
그러나 다시는 복원시킬 수 없는 예술품들을 파괴하는 죄악은 뭣으로도 용서될 길이 없다.
얼마 전에는 「암스테르담」에서 「고호」의 그림이 칼로 산산이 찢긴 적이 있었다. 「피카소」의 그림이 먹칠 당하기도 했다. 그저 반 문명·반 예술의 병적 시대 풍조 탓이라고만 치워버릴 수 있겠는지. 『가장 큰 범죄는 예술에 대한 것』이라는 「앙드레·말로」의 말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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