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격전장과 책 속의 역사-노병과 신병의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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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25의 격전장을 누볐던 노병 조복원 준위(49·육군2378부대본부)와 신병 허봉성 일병 (23·명지대법과재학·2378부대경비소대)이 대좌했다. 노병은 28년 전의 상흔 담긴 과거를 털어놓았고 신병은 그로부터 역사의 교훈을 들었다.
허봉성 일병=6·25동란이 났을 때 전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었는데 선배님은 당시 어디계셨읍니까?

<탱크에 맨손으로>
조복원 준위=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서 당시 일동중사(지금의 하사)로 지리산 공비토벌에 참가하고 있었어요. 6월26일엔가 수도 경비 간다고 기차를 타라고 해서 좋아들 했죠. 그날 저녁 노량진에 도착했고 밤에 서빙고에 내려 징발된 민간차량 편으로 미아리고개에 배치되고서야 전쟁이 터진 줄 알았어요.
-개전 초기에 정말 허무하게 밀렸죠?
『우리에게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M-1소총뿐인 국군들은 「탱크」를 구경한 사람도 없었고 총알을 맞고도 그냥 달리는 적「탱크」가 나타나기만 하면 질겁을 해서 그대로 달아나고 했어요. 나중에 3.5「인치」 대전차 「로키트」포가 지급됐을 때도 구멍만 뻥하게 뚫린 겉모양이 신통치 않아 실제로 「탱크」를 잡는 위력을 보고서야 안심을 했어요.』
당시 북괴군들은 준비가 대단했겠죠?
『「탱크·대포」등 장비가 훨씬 우세했고 훈련도 많이 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막상 붙어보니까 전투력은 별것 아니었어요. 그리고 괴뢰군들은 남침을 하느라고 총동원했는지 포로나 전사자들 중에 중학생같이 보이는 앳된 소년들이 많았어요』
전후세대들은 6·25의 참상이나 그들의 잔악성을 책으로만 배웠지만 그때 참상이 대단했죠?
『보지 않은 사람은 믿어지지 않을 거예요. 지리산 공비토벌 때 산을 으르면 공비들이 민가에서 약탈을 한 뒤 동조하지 않는 양민을 더덕 캐는 대 꼬챙이로 처참하게 찔러 죽여 놓은 것을 여러 번 보았어요.
또 북진 때 원산형무소에 들어가 보니까 여자들을 발가벗겨 도끼로 죽인 다음 우물에다 모두 담가놓았더군요.』
-전투를 하면서 가장 안타깝고 답답하게 생각됐던 것은 무엇이었어요?
『전차에 대한 공격방법을 몰라 안타까왔지만 그건 전차를 만났을 때 일이고, 무엇보다 보급이 되지 않아 M-실탄이 없고 밥을 못 먹는 것이었어요.
연대장은 「지프』로 M-1실탄을 나눠 주는게 일이었고 전투 중에 우리는 굶는 것을 밥 먹 듯 했으니까….』
북진 땐 어디까지 올라갔읍니까?

<하루 수백리 북진>
『26연대인 우리부대는 안강·기계전투에 투입된 뒤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포항 형산강을 건너 동해안쪽으로 38선을 제일먼저 돌파했어요. 원산까지는 하루 몇 백리씩 진격을 했고 삼수갑산·혜산진까지 북진해서 우리부대가 혜산진부대가 됐지요. 북진 때 전방부대가 하도 빨리 올라가서 후방부대가 미처 따라 잡을 수가 없었댔어요. 휴전 때 까진 특무상사로 싸웠고 54년1월1일자로 준위가 됐어요.』
6·25당시에 학도병의 활약은 어땠어요?
『학도병들은 교복을 그대로 입고 학생모에 흰 테만 두르고 싸웠죠. 그러나 요즘처럼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총을 처음 만져보기 때문에 실탄장전을 할 줄도 몰랐고 또 손가락이 물릴까보아 겁을 내는 학도병도 더러 있었어요. 안강전투에서는 소총을 든 학도병이 뒤에 서고 기관총이 앞에 나가기도 했으니까-. 전력은 형편없었지만 그때 학도병의 정신은 요즘 학생들이 본 받을 만 해요.』
저도 대학에 다닐 때 교련을 받고 문무대에서 10일간의 종합교육도 받았는데 그것이 군대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이제 눈감고 충분해 결합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니까 언젠가부터 군인정신이 들게되고 제복에 대한 애착심도 갖게 됐어요. 요즘 우리들끼리는 지겹게 훈련만 할게 아니라 정말 한번 붙어봤으면 좋겠다는 얘기들을 하곤 해요.
『요즘 우리국군의 장비나 훈련·보급·사기 등을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 있어요. 지금 사병들은 호강하는 거예요. 우리 때는 배를 곯는 것은 말할 것 없고 일본군의 폐습이 남아 저녁마다 점호 끝내고는 「배트」로 맞는 게 일이었어요.』

<비극은 없어져야>
정말 그래요. 군대의 식생활이 중류 이상은 되는 것 같아요. 「메뉴」에 「커리·라이스」와 자장밥이 다 나오니까요.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니던 「트럭」부식차가 냉동차로 바뀌었고 1식3찬에 양껏 먹을 수 있어요. 전에는 가족들이 면회 오면 나눠 먹으라고 떡을 쪄왔던 모양인데 요즘엔 반기는 사람이 없어요. 위문품을 보내더라도 「텔리비젼」이나 책 보내주는 것을 좋아하죠.
『그런 것이 모두 군의 사기를 높이는 거예요.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장비로 잘 훈련된 국군이 있는 한 6·25의 비극은 다시없을 거예요.』 【정리=이영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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