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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한 방에 훅 가는 무서운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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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신문쟁이들에겐 오래된 묵계가 있다. 내부 토론은 자유롭게 하되 그 내용을 바깥으로 흘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이다. 민감한 내부 논의를 의도적으로 유출하면 컴퓨터 로그인 기록이나 복사·통신 이력 등을 통해 언젠가 꼬리가 밟힌다. ‘자유 토론-내부 보안’은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다.

 세월호 참사로 KBS가 파업 중이다. 지난 4월 28일 KBS 근처 식당에서 불씨가 튀었다. 보도국장이 점심 회식 때 교통사고와 비교하며 세월호 희생자들을 비하했다는 것이다. 당시 참석자는 딱 5명. 이 가운데 당사자인 보도국장과, 그의 해명을 뒷받침한 과학재난팀장을 빼면 평기자 3명이 남는다. KBS 조사에서 이들도 모두 보도국장의 발언을 “세월호 희생자가 300여 명이다. 한 달에 교통사고 사망자도 500명이 넘는다. KBS가 안전불감 뉴스기획을 할 필요가 있다”로 복기(復棋)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어디서 누구에게 “세월호는 한꺼번에 300명이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리 많은 건 아니다”라는 말을 전해들은 것일까. 노조의 주장은 여과 없이 곧바로 한 인터넷 매체에 보도됐다. 회식 참석자 5명 모두 결백을 주장하는데도 말이다. 아직 어느 쪽이 진실인지 의문이다. 다만 양쪽 거리가 아득한 만큼 누군가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 팩트와 멘트를 중시하는 방송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KBS 사태의 발화점은 이처럼 모호한데, 불길은 삽시간에 번졌다. 사이버 세상에는 옛날 발언까지 끄집어 내 “KBS 보도국장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악질 언론 부역자”란 마녀재판이 판쳤다. 여기에 보도국장은 “대꾸할 가치가 없으며 명예훼손 소송을 내겠다”고 버티다 속절없이 무너졌다. 한 KBS 간부는 “돌아보면 초동단계에서 위기관리가 한심했다”고 혀를 찼다. “즉시 감사실에 자진 감사를 청구했어야 했다. 곧바로 회식 참석자 4명을 소집하고 노조 측과 3자 대질을 통해 진실을 가려야 했다….”

 지난주 서울대 교수 200여 명이 세월호 시국선언문을 내고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했다. 의미 있는 성명이다. 하지만 시국선언에 참가한 교수가 다른 교수의 e메일을 페이스북에 공개하면서 개운찮은 뒷맛을 남겼다. ‘교통사고에 불과한 일을 가지고 서울대 교수 명의의 성명서를 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개나 소나 내는 성명서! 자제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물론 동의하기 힘들고 지나치게 거친 의견이다. 그러나 시국선언에 반대한다고, 동료교수의 e메일을 공개해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소통을 이야기하는 시대다. 소통은 말 그대로 ‘트다(疏)’와 ‘연결하다(通)’라는 뜻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소통은 불가능하다. 말을 섞기에 앞서 상대방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보도국장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왜곡해 옮기거나, 동료교수가 보낸 e메일을 함부로 외부에 까버리면 더 이상의 소통은 기대할 수 없다.

 지난 2009년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정조가 최대 정적이던 우의정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297통이 발견된 것이다. 위세를 떨치던 ‘정조 독살설’이 쏙 들어갔다. 오히려 정조는 국정현안을 전날 밤 편지로 비밀리에 지시했고, 심환지는 이를 충실하게 따랐다.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는 오랫동안 정조 독살설의 배후로 몰렸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예민한 서찰들을 200년 넘게 꼭꼭 숨겼다.

 앞에 언급한 KBS 간부는 “요즘 입조심을 넘어 아예 말 섞기조차 꺼린다”며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친구인 서울대 교수도 “동료 교수와 e메일을 주고받기도 겁난다”고 했다. 무릇 사색당파가 극성을 부린 정조 시절에도 소통의 기본적 예의는 잊지 않았다. 지금은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한 방에 훅 보내는 무서운 세상이다. 시나브로 우리는 침묵과 불화의 늪으로 한발씩 더 미끄러지는 느낌이다. 지난 210여년의 세월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철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