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제도와 기능의 개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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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내년예산규모를 현 단계에서 정확히 어림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에 속한다. 예산당국은 내년예산 증가율을 약25%선으로 잡고 있는데 반해 각 부처의 예산요구액은 금년보다 무려 74%나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내년 예산편성 작업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편대한 세출요구를 빠듯한 세입에 맞추기 위해 큰 진통을 겪어야 할 것 같다. 삭감액이 더 크기 때문에 기술적인 예산편성작업은 더 어려울 것이다.
만약 내년 예산을 과거와 똑같은「패턴」으로 편성한다면 예산규모는 늘어날 수밖에 없고, 또 실질적인 적자예산이 될 것이 뻔하다.
현 우리나라 예산의 골격은 60년대에 마련된 것으로서 급격한 내외여건의 변화에 탄력적인 대응을 못하고 있는 점이 많다. 예산제도의 개혁이 몇 차례 시도되었으나 아직도 근본적인 변모는 찾아 볼 수 없다.
예산규모가 크게 늘어나고 예산의 기능이 달라져야함에도 불구하고 60년대의 골격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재정의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있어야겠다. 60년대의 재정의 기능은 경제개발을 점화시키고 이를 적극 지원하는데 있었다. 정부주도의 경제개발을, 정부예산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의 우선 순위를 경제의 양적 성장에 둘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내외여건에 비추어 그러한 재정의 기능에는 이제 어떤 변모가 있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보다 경기조절기능, 물가안정을 위한 통화안정, 사회적 형평과 소득재분배를 위한 조정기능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예산을 단지 과거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 단계에서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안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바꾸어 말해 우리나라의 가용자원을 현 단계에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에서 어떻게 나누어 쓰는 것이 국민 경제적 차원에서 가장 효율적인지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
이러한 재정의 기능변모에 대한 인식만 이루어진다면 예산규모나 구조는 자연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민간의 기업활동을 위한 지원시설은 정부예산에서 하면서 교육·대중교통시설등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민간에 맡긴다든지 하는 일은 과거의 발상에서 못 벗어났기 때문에 생긴 전형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또 정부당국이 안정기조를 강조하면서 재정에선 적자를 낸다든지 정부기구를 계속 늘린다든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재 정부재정이 해야할 큰 몫은 고도성장과「인플레·무드」를 진정시키고 그동안의 물가상승 때문에 생긴 소득배분의 왜곡, 빈부격차의 심화를 바로 잡는 것이라 생각된다. 성장보다 균형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노력이 더욱 절실한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 인식만 정확하다면 균형예산의 편성, 외환부문의 통화증발을 완화하기 위한 재정의「쿠션」역할, 경비성 지출의 억제 등은 자동적으로 뒤따를 것이다.
예산편성을 단지 수자 조정으로 생각하지 말고 현 여건에서 무엇이 가장 요구되는가에 대한 인식부터 철저히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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