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몽순의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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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강화에서의 항전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미 조정은 몽고의 괴뢰나 다름없었다. 피난살림의 어려움에 지친 고관들 중에는 은근히 환도를 바라는 소리가 높아만 갔다.
그들에게는 알맞은 명분이 있었다. 더 이상 백성을 괴롭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끝까지 항전할 것을 각오한 삼별초는 1천여 척의 배에 갈라 타고 강화도를 떠났다. 이때의 장군 배중손은『구국의 뜻을 둔 자는 우릴 따르라』고 호호했다.
이들은 전라도 진도에 새 근거지를 마련했다. 금새 그 세력은 전라도와 경상도에 퍼졌다.
이 때문에 몽고가 보내려던 일본초유사도 발이 묶여 버렸다. 그러나 몽고와 고려연합의 대군을 언제까지나 막아낼 수는 없었다. 배중손 장군도 전사하고 말았다. 1271년5월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삼별초의 항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다시 김통정의 영도아래 이번에는 탐라로, 즉 오늘의 제주도로 건너가 항전체제를 갖추었다.
『적 이미 제주에 들어 내외 성을 쌓고 그 험고함을 믿고 날로 창궐, 늘 나와 노략하고 병해숙연 하도다.』 이렇게『고려사』에는 적혀 있다.
제주는 몽고 군으로서도 일본 침입을 위한 좋은 발판일수 있었다. 그게 반 몽항전의 근거지가 되었다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원의 장군 홍다구는 김통정에게 투강을 권고했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전활동은 더욱 치열해지기만 했다.
원도 에서는 세조가 주제한 군사회의에서 일본침입에 앞서 제주정벌이 있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드디어 1273년 초 몽고둔전 군2천, 고려군병5천 수군3천, 원군2천 도합 1만3천의 대군이 제주로 쳐들어갔다.
4월말 혈전 끝에 내·외 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아무도 살아남지는 못했다. 3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여기서 끝이 나고 말았다.『고려사』에는 삼별초의 지도자들을 반역열전 속에 끼어 넣고 있다. 왕조에 대들었으니 당연하기도 할 것이다.
일본의 작가 정상정도 소설『풍도』에서 강화도를 벗어난 다음의 삼별초를 해적처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삼별초를 그토록 오랜 기간 세계역사상 가장 강했다는 몽고와 맞설 수 있게 한 것은 뭣이었을까, 그들을 끝까지 싸우게 만든 것은 과연 뭣이었을까. 그 해답은 너무나도 명백할듯하다.
어제 삼별초가 마지막 한명까지 싸우다 죽은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에서 항몽순의비의 제막식이 있었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혈맥을 또 하나 되찾아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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