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의 취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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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몇 해 전에 서독의「레코드」회사「엘렉트라」가『재상들의「콘서트』라는 표제의「디스크」를 발매한 적이 있다.
서독의 역대 수상들이 각자 좋아하는 「클래식」곡을 묶은 것으로, 「아데나워」는「베토벤」의『운명』교향곡, 「에르하르트」는「브람스」의『「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골랐다.
한편「키징거」는 「모차르트」의 『「주피터」교향곡』을, 「브란트」는 까다롭게도「바하」의 『전자악기에 의한 「브란덴부르크」의 협주곡 제3번』을 골랐었다.
왠지 세계의 재상 중에는 음악애호가는 물론이요 「프로」급의 연주자들도 많다. 몇 해 전인가의「유럽」안보회의에서는 점심후의 여흥으로「슈미트」서독 수상이 「베토벤」의 제9 교향곡 중의 『환희의 노래』를「피아노」로 연주하고, 여기에 맞춰 「캘러헌」영 외상이 노래를 불렀다.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파데레프스키」는 오히려「피아니스트」로 더 유명했었다. 그는 대통령자리를 물러난 다음에는 다시 직업적인 연주생활을 가졌다.
지금 행방이 묘연한「캄보디아」의「시아누크」도 대단한 음악광이었다. 그는『일국의 왕으로 정권을 쥐기보다는「오키스트러」의 지휘봉을 쥐고싶다』고 까지 말했었다.
살아있는 재상 역임자 중에서는 역시「히드」전 영 수상이 으뜸인 듯하다.
그는「런던」교향악단의 기금모집「콘서트」에서「엘가」의 까다로운「코케인」서곡을 거뜬히 지휘해 낸 적이 있다.
그러나「히드」는 지휘자로서보다는「파이프·오르간」주자로 더 유명하다. 언젠가도 「덴마크」를 방문하자「파이프·오르간」연주로 음악외교의 멋진 솜씨를 발휘했다.
그런「히드」씨가 최근 표연히 서울에 왔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세종 회관에 들러「파이프·오르간」을 1시간 가까이 연주했다.
물론 관중도 없는 텅 빈「홀」이었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저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그는 재상도 아니요, 당수도 아니다. 그래서 그가 소리소문 없이 서울에 온 것도 아니다.
아마도 음악을 몹시 즐기는 야인「히드」의 인품 탓이리라 볼만도 하다.
정치밖에 모르는 정치가처럼 딱한 게 없다.「닉슨」의 오늘이 더욱 비참해 보이는 것도 그에게 그런 취미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훌륭한 재상일수록 취미가 다양했다. 그림을 그린「처칠」, 화학자로도 뛰어났던「이스라엘」의「와이츠만」초대 대통령, 시인으로 유명한「세네갈」의「상고르」대통령…·
하기야 취미는 꼭 정치가에게만 필요한 것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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