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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줄 묶인 김정은 … "5조~20조 대일청구권 자금 고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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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과 일본이 대북 제재와 납치 일본인 문제를 맞바꾸는 빅딜에 합의했다. 당초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28일(현지시간) 끝난 사흘간의 북·일 공식협상에서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으로 연막을 치다 깜짝쇼를 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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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일이 공개한 회담 결과에 따르면 양측은 “조(북한)·일 평양선언에 따라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을 해결하며 국교 정상화를 실현한다”는 목표로 이번 협의를 진행했다. 평양선언은 2002년 9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90CE>) 총리가 ‘국교 정상화’를 포함한 4개 항에 합의한 걸 말한다.

29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북·일 합의 사항을 발표하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 [도쿄 로이터=뉴스1]

 먼저 일본 측은 국제공조와 별도로 취해온 독자적 대북 제재의 해제를 당근으로 제시했다.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금지 해제는 장거리로켓 도발로 2006년 7월부터 금지된 만경봉호(원산~니가타를 오가는 여객선)의 운항 재개를 겨냥한 것이다. 북한이 원한 식량·비료 등 대북 지원의 길도 열어놓았다.

 북한이 수용한 항목 중에는 납치 일본인 문제 등을 다룰 특별위원회 구성이 눈에 띈다. 이를 통해 납치문제와 관련한 조사 및 확인 상황을 수시로 일본 측에 통보하기로 했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숨진 일본인 유족의 방북이나 성묘, 유골 반환 등의 문제도 위원회 활동에 포함시켰다.

 이번 합의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의 도발적 행동으로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묶인 김정은으로선 대북 압박의 고리를 끊을 교두보를 마련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고층아파트 등 건설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김정은이 50억~200억 달러(5조800억~20조35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대일청구권 자금(식민지배 배상금) 확보를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은 5억 달러였다.

 김정은으로선 아버지 김정일이 남기고 간 북·일 관계개선이란 숙제를 이어간다는 상징성도 있다. 2002년 정상회담 때 김정일은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하면서까지 대일접근을 했지만 오히려 ‘북한의 발표를 믿을 수 없다’는 일본 내 비판여론에 부닥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정은이 아베와의 정상회담을 추진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잇따른 도발행보와 대남비난으로 박근혜 정부와의 파국을 자초했다. 전 미국프로농구협회(NBA) 출신 데니스 로드먼을 평양에 초청하고,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를 통해 인질외교까지 펼쳤지만 워싱턴은 꿈쩍 않고 있다. 아베를 선택함으로써 김정은이 “서울·워싱턴이 안 되면 도쿄로 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아베로서는 대북관계에서 최대 현안인 납치 일본인 문제 해결의 발판을 놓았다. 납치자 이슈는 일본 국민의 대정부 지지여론을 좌우하는 바로미터였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역사·영토 문제로 한·중과 충돌한 아베가 외교적 고립 탈피를 위해 북한과 손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정은과 아베의 의기투합이 얼마나 지속 가능한 성과를 낼지는 불투명하다. 이번 북·일 합의의 핵심은 북한이 특별조사위를 구성해 조사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에 일본이 대북 제재를 해제한다는 점이다. 북·미 간 핵 프로그램의 동결·보상 합의처럼 ‘행동 대 행동’으로 맞물려 있다. 이 때문에 양측이 이행과정에서 삐걱거릴 가능성이 큰 구도다. 특히 납치 일본인의 규모나 생사확인을 두고 대립할 수 있다. 북한이 이미 죽었다고 통보한 요코다 메구미(1977년 11월 납북 여중생)의 생존설 등은 핵심 뇌관이다. “생존자가 발견되는 경우 귀국시키는 방향에서 협의한다”는 합의사항이 말처럼 쉽진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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