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지를 통해본 문단사사 40년대 「문장」지 주장-제58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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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점에 있어서는 벽초도 이태준과 마찬가지였다. 『벽초를 둘러싸고』라는 문학좌담회가 있은 직후에 명월관에서 참석자 일동이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벽초는 그 자리에서 나에게 『나는 공산서적은 한 권도 읽은 것이 없어서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공산주의는 내 생리에 맞지 않아…』하고 말한 일이 있다.
그처럼 공산주의를 싫어하던 벽초가 월북을 하게된 것은, 그의 큰아들 홍기문과 작은 아들 홍기무가 진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홍기무는 초대 감찰원장이었던 위당 정인보의 사위로서 사변 중에 숨어있던 장인을 찾아내어 북으로 납치해 갔다는 장본인이기도하다.
박태원도 역시 생리적으로 공산주의자는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서울이 공산치하에 있을 때 나는 홍요민의 집에서 박태원과 함께 4분의1쯤 밖에 없는 술을 셋이 한잔씩 나누며 시국담을 나눈 일이 있었는데, 박태원도 그 자리에서 자기는 공산주의에 공명을 못하겠다고 명백히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후일 월북을 하게 된 것은 박태원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안회남이 북에서 문학가동맹의 서기장으로 부임해 왔기 때문이었다. 안회남은 박태원을 적극적으로 끌어내어 본의 아닌 부역을 시켰기 때문에 9·28이 오자 박태원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부득이 월북했으리라고 본다. 이북이 정말로 좋아서 월북했다면 가족을 그냥 내버려두고 자기만 월북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점은 화가 정현웅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정현웅은 워낙 순박한 성품이어서 사변 후에 살기 위해 미술가동맹에 가담하자, 그들이 시키는 대로 김일성의 초상화를 수없이 그렸다. 현웅은 신문 삽화계의 제일인자로서 초상화를 잘 그렸기 때문에 신임이 두터워져서 나중에는 평양시찰을 보내주는 영광(?)까지 입었다. 그때 동행한 문인은 신인작가 전홍준이었다.
그런데 정작 평양에 가보니 이북동포들의 생활은 너무도 비참하였다. 이북의 실정은 그들이 선전하는 것과는 너무도 차이가 컸기 때문에 두 사람은 모두 크게 실망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평양에 다녀오자 공산당국자가 이북을 예찬하는 글을 쓰라고 명령하기에 정현웅과 전홍준은 거짓말 예찬기를 인민일보에 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9·28수복으로 국군이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정현웅은 공산도배들을 따라 월북하고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본의는 아니었더라도 화가대표로 평양시찰을 다녀와 인민일보에 「이북예찬기」 를 쓴 기록이 버젓하게 남아있으므로 그냥 눌러 있다가는 목숨이 남아날 것 같지 못했다.
그리하여 하룻밤사이에 보따리를 세 번씩이나 쌌다 풀었다 하다가 결국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가족만은 남겨 둔 채 혼자 북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러면 전홍준은 어찌 되었던가. 평양에 다녀온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허위 선전에 완전히 환멸을 느꼈다. 그리하여 부역한 근거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28수복으로 공산도배들이 총퇴각할 때에도 전홍준 만은 그냥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후에 어찌되었는지 오늘날까지 그의 소식은 전연 모른다.
작가 김영석도 본의 아니게 월북한 사람의 하나다. 그도 역시 살기 위해 문학가동맹에 끌려 다니다가 부역을 한 관계로 부득이 월북했다. 9월25일 새벽에 나는 보따리를 둘러메고 북으로 넘어가는 김영석과 삼각동 뒷골목에서 딱 마주쳤는데, 그는 나를 보자 대뜸 눈물이 글썽해지면서 『나는 부득이 평양으로 가는 길이요. 정형은 몸 조심히 잘 지내시오』하고 최후의 작별인사를 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본의 아니게 월북하는 사람들의 처참한 몰골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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