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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사고의 외교적 단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소련에 억류되었던 대한항공의 기장과 항법사가 30일 억류 열흘만에 송환되었다. 이로써 항로 이탈을 한 KAL기의 소련 영내 강제 착륙 사건은 외교적으로는 일단 매듭이 지어진 셈이다.
미수교국인 소련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조속히 사건이 매듭 된 것은 예상 밖의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민간 여객기에 총격을 가한 유감이 없지도 않으나, KAL기의 승객과 승무원의 송환 및 사건 해결 과정에서 보여준 소련의 태도는 일반 문명국 기준에 손색이 없는 것 같다고 공산 국가이긴 하지만 역시 강대국으로서의 여유와 성숙성을 지녔다고 할 만 하다.
소련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측의 대응 및 미국의 중재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기장과 항법사는 소련을 떠나기 직전 소련 기자들로부터 박 대통령의 담화 내용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 당국에 사의를 표한 박 대통령 담화에 대한 소련 측의 관심도를 보여준 것이라 해야 하겠다.
지난 71년 동성호의 경우 선장이 1년 반의 징역형을 받아 13개월의 억류 생활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사건의 조속 해결을 가져온 한·소간의 분위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번 사건 해결 협상이 미·소 주도형으로 이뤄졌다는 데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명의 승객도 없는 미국이 대소 교섭을 맡아주었고, 소련도 미국만을 상대했다는 사실은 고맙다는 심정적인 차원을 넘어 국제 경치의 현실을 투영한다고 하겠다.
역시 미·소가 국제 정치의 주도국이란 사실과 함께 우리의·대공산권 외교 수행에 있어 적극적 의미든, 소극적 의미든 미국의 역할이 결정적이란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다만 KAL사건이 이렇게 국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해결을 보았다고 해서 사건 자체의 문제점이 호도 되어선 안 된다.
승무원도 모두 송환되었으니 이제는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을 철저히 따질 차례다.
승무원들이 밝힌 항로 이탈의 이유는 나침반과 「로런·스테이션」 등 방향계기의 고장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리」발 KAL기는 이 사고 직전에도 방향계기의 고장으로 회항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북극 항로를 운항하는 「파리」발 KAL기는 이미 그 전부터 방향계기의 고장으로 인한 사고의 개연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비할 틈도 없는 무리한 운항이 사고의 개연성을 높인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강제 착륙 사건 이후에도 벌써 KAL기에 의해 2건의 비상 착륙이 연발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이번 사고의 원인과 KAL측의 책임을 철저히 따짐으로써 비슷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경종을 울려야 할 것이다.
승무원의 책임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비상 착륙으로 탑승자들의 생명을 구한 것은 칭찬 받을 일이지만, 사고 자체를 내지 않으니 만은 못하다.
2개의 계기가 고장나면 다른 계기나 목측으로 항행이 불가능했는지, 고장의 조기 발견에 의한 회항이 어려웠는지, 또 소련 전투기의 유도에 의한 즉시 착륙을 회피해 피격을 자초했는지 등이 철저히 따져져야 하겠다.
기장이 소련 전투기의 착륙 유도에 불복했다는 사실을 자인했다는 소련 측의 발표는 민간기에 대한 총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방적인 발표일는지 모르나 더욱 그 진상이 정확하게 밝혀져야만 할 이유다. 물론 경위야 어떻든 경고 사격 이상의 민간 여객기에 대한 소련의 총격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번 사고의 원인과 책임을 철저히 규명하여 사고 재발을 막고, 사건 해결 과정에서 나타난 긍정적 외교 신호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이제부터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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