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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보 삭제 미스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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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2005년 12월 도입된 퇴직연금은 기업이 근로자들의 노후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외부의 금융회사에 적립해 퇴직 때 연금이나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 84조3000억원이 적립됐고 이 금액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를 유치하기 위한 은행·보험·증권사의 경쟁이 치열하다.

 금융회사 중에선 덩치가 큰 은행들이 퇴직연금 자금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은행들은 기업이나 근로자에게 받은 자금의 90%를 자신이나 다른 은행 예·적금으로 운용하고 있다. 자금의 50%는 자기 은행 예금, 나머지 40%는 은행끼리 서로 예금을 들어주는 구조다.

 안전하긴 하지만 금리가 연 2% 중반밖에 되지 않는 예금으로만 퇴직연금을 운용하면 수익성이 낮아진다. 장기적으로 ‘금리+α’를 추구하는 퇴직연금 도입 취지에도 어긋난다. 이 때문에 금융위원회에선 금융회사가 자신의 상품에 투자하는 비율을 줄이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현재 50%인 자기상품 비율을 올해 중 30%로 줄이고 내년부터는 아예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밝혀왔다. 자기회사 상품보다는 다양한 상품을 발굴해 적극적으로 운용하라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최근 금융위에선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은행과 증권·보험사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있는 퇴직연금 감독규정을 고치겠다고 관보에 공고를 했다가 이를 닷새 만에 삭제한 것이다.

 금융위는 지난 23일자 관보에 퇴직연금감독규정 변경 예고 공고를 했다. 관보는 정부가 발행하는 공식 문서로 관보에 실려야만 법률이나 법령의 효력이 발생한다. 여기엔 퇴직연금 사업자가 자사의 예금(원리금보장상품)으로 운용할 수 있는 비율을 전체 자금의 50%에서 30%로 줄이고, 다른 사업자와 교환할 수 있는 한도도 10%로 제한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는 지난해 11월 27일 발표한 금융업 경쟁력 강화 방안과 지난해 12월 2일 자본시장 역동성 제고 방안에서 예고됐던 것이다. 하지만 금융위는 28일자 관보를 통해 위의 두 가지 규정을 삭제한다고 정정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2008년 금융위가 출범한 이후 공고를 정정한 것은 모두 다섯 번이다. 대부분 영문 철자나 날짜 같은 소소한 잘못을 수정한 것이다. 이번처럼 은행과 증권·보험사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린 내용은 아니었다. 핵심적인 내용을 고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관보가 배포되기 전날인 22일 오후 금융위 자산운용과에서 배포한 ‘퇴직연금감독규정 규정 변경 예고’ 보도자료에는 30% 축소 방안과 10% 교환 제한 규정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 나온 관보엔 이 내용이 포함됐다. 금융위 자산운용과 관계자는 “관보 인쇄를 위해 20일 안전행정부에 자료를 넘겨줬는데 당시 내부 보고와 협의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협의를 마친 22일 보도자료를 냈지만 관보를 고치지 못해 나중에 수정했다”고 설명했다. 관보 업무를 담당하는 안행부 법무담당관실 관계자는 “관보 게재를 위해선 사흘 전에 문구를 줘야 한다. 수정은 전날 오전 10~11시까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설명으로 보면 금융위는 관보 수정이 가능한 22일 오전까지도 30% 규제에 대한 협의를 마무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금융위의 다른 관계자는 “30% 제한을 예정대로 추진하려 했지만 전반적으로 규제가 완화되는 분위기라 더 검토해야 할 것이 생겼다. 또 관계기관과 협의를 한 결과 이 제도를 우려하는 업권(은행권)의 얘기를 더 들어보고 결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그는 “ 30% 규제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6월께 규제개혁과 관련해 업계를 설득하고 의견을 추가로 수렴하면서 계속 진행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증권·보험업계에선 금융위의 이런 움직임을 우려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자기상품 편입제한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은행권의 담합을 막아 경쟁을 활성화하고 가입자의 기대수익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규제”라며 “지난해부터 공언한 내용을 뒤집어버리면 누가 정부 정책을 신뢰하겠나”라고 반문했다. 일부에선 금융위가 은행 등 힘센 업계의 힘에 휘둘리고 있어 정책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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