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특기학생(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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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실 얼굴에 침뱉는 꼴이지만 내 아들의 공부는 참으로 한심해요. 한자실력은 물론 영어단어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요. HOW라는 단어의 뜻조차 몰라요. 졸업하면 사회생활은 어떻게 해나갈지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국가대표선수로 명성을 떨쳤던 K선수의 아버지가 아들의 고교졸업을 앞두고 한 한탄이었다.
그러나 K선수는 체육특기자로 거뜬히(?) 대학에 진학, 부친의 걱정을 덜어주었고 졸업 후 이제는 어엿한 고교체육교사로 재직중이다.

<"한자도 영어도…">
도대체 운동선수들에게 학교수업이라는 것도 있는지 없는지, 하는지 마는지, 학교에서는 물론 본인들까지도 완전히 외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모고교에서 있었던 일-. 야구선수들이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재학생들은 물론 몇몇 교사들까지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3학년을 맡고있는 H교사는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L선수에 다가갔다. 자기 반 학생이면서도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교실에는 안 들어와도 항상 출석으로 간주돼왔다. 『아저씨, 좀 비켜주세요. 공에 맞습니다.』 바로 문제의 학생 L선수가 소리친 것이다. 이처럼 담임의 얼굴을 모르고 1년을 보내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서울 H고 축구팀은 매일같이 교외에 있는 어느 운동장을 빌어서 연습을 해왔다. 학교운동장은 축구부에까지 차례가 오지 않는다.
학생수가 많다보니 교련이나 체육시간만으로도 모자랄 지경-. 그래서 이들은 매일 상오 9시면 연습장으로 가기 편한 변두리 버스정류장에서 집합해 연습장에 가곤 했다.
가방 속에는 유니폼과 스파이크 등 운동용구만 들어있다.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교외운동장에서 산다. 아니 하루종일 연습에 열중하는 것이다. 하루종일이래야 대체로 휴식시간이 연습시간보다 더 많다.
매일같이 가르치는 코치도 지칠 때가 많아 핑계를 내세워 연습장을 이탈한다. 선수들은 휴식 아닌 휴식시간이 된다. 이럴 때를 선수들은 보통 『뱀 잡는다』 『풀 뽑는다』는 말로 표현한다. 지루했다는 뜻일 게다.
E고 야구부도 마찬가지. 교외연습을 거듭했지만 『뱀 잡는 날』이 많았고 대회에 출전했어도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이러다보니 학교에서는 학교대로 졸업선배들은 선배들대로 선수들만 들볶아댔다.

<교외 운동장이 교실>
결국 선수 7명이 집단이탈한 적이 있었다. 학교측에서는 이들을 모두 퇴학처분해 버렸다. 이 경우 선생과 학생(선수)은 한번도 대면한 일없이 퇴학을 시키고 당한 것이다.
더 심한 경우는 낙제 아닌 낙제를 시키는 것이다. 학교측에서는 막대한(?) 스카우트 비용을 들여가며 때로는 용돈까지 주면서 선수를 끌어들여 연습을 시켰는데 성적이 별로 좋지 않을 때 비상수단을 동원한다. 선수를 진급시키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3학년 학생을 아예 2학년 학생으로 데려올(전학) 경우도 있다. 심한 경우 3년을 묵힌 경우까지.
어느 지방의 고교야구선수는 2학년 때 징집영장이 나오기도 했다. 지방의 C, N, H고 등 운동경기로 소문난 학교에서는 2군·3군까지 있다.
이렇게 해서 학교를 졸업한 체육인 S씨는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꽤 알려진 인물. S씨는 외국에 나갈 때는 항상 가슴깊이 입국카드와 세관통과 물품 기재요령의 서식을 간직한다. 기내에서 입국카드를 주면 얼른 이 기재요령을 빼내 쓰곤 했다는 것. 이 정도는 그래도 눈치나 빠른 편.
많은 선수들이 입국카드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다. 비행기 안에서 이를 들고 다니며 소란을 피우기가 일쑤. 그래서 임원이 전담, 대필을 해주는 경우가 보통이다.

<공부 안 해도 되나>
운동 때문에 공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이제는 운동선수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변해버렸다.
육상·수영·권투·레슬링 등 개인경기 종목보다는 축구·야구·농구·배구 등 소위 인기 있는 단체종목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리고 일부학교에서는 학교운영자들이 앞장서서 선수들의 수업을 눈감아주고 연습에만 치중하고 있다. 고교평준화 되기 전에 학교이름을 빛내고 싶을 때 팀을 만들고 팀을 만들었으니 성적을 올리기 위해 극성을 떤 것이다.
『체육회는 해마다 선수등록 규정을 강화하고 공부하는 스포츠인을 만들려고 하지만 학교측의 자율적인 협조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대한 체육회 박찬욱 사무총장의 설명이다.
그래서 문교부는 몇 년 전부터 중·고교선수들이 각종 전국규모의 대회에는 1년에 3번이상 출전할 수 없다고 못박았지만 그동안 이 같은 지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 또한 사실. 문교부나 일선 시·도 교육위원회가 철저히 감독을 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
올해에도 이 같은 지침이 또다시 각급 학교에 시달됐다. 보다 강력한 제재규정이 첨부돼 아마도 강력한 단속이 이루어질 모양이다.

<학교체육 재검토>
그래서 벌써부터 몇몇 학교나 협회에서는 소위 인기 있는 학생대회가 위축되지 않을까 걱정들이다.
선수들의 교육적인 관리나 고교과정을 마치면서 갖추어야할 고교졸업생으로서의 소양문제에 관해서는 별로 염두에 둔 것 같지가 않다.
오래 전 얘기지만 일류고교인 S고에서는 성적이 85점이상인 학생에게만 운동부에 들어가게 했었다. 이 학교의 야구·럭비·농구부는 다른 학교에 그다지 뒤지지 않았다.
더우기 운동부의 학생들은 우등생이나 준우등생이라는 푯말이 절로 붙기 때문에 하급생들이 우러러보기까지 했다.
이런 학교풍토에서 학교체육을 키워나갈 방도는 없을지…생각해봄직하다. 【노진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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