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이대로 가나] 中. 모순 투성이 수가 체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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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백혈병 환자 金모(40)씨는 얼마 전 골수 채취를 하면서 평소와는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채취용 바늘이 뼛속으로 잘 안들어가는 바람에 통증이 심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병원에서 끝이 무뎌진 일회용 바늘을 재활용했기 때문이었다.

金씨는 "바늘을 아무리 잘 소독한다 해도 구멍 속까지 되겠느냐. 이러다 다른 균에 감염될 수도 있다"고 분개했다.

그러나 金씨의 고통을 무조건 재활용 바늘이나 이를 사용한 병원 탓으로 돌리기만은 어렵다. 근본적으론 불합리한 건강보험 수가(酬價) 때문이다.

예컨대 골수 채취료는 한번에 2만8천3백여원이다. 바늘값도 여기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바늘 하나에 8만~9만원이므로 배보다 배꼽이 훨씬 크다. 그러다 보니 병원 측은 바늘을 재활용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건보수가 체계나 진료비 인정기준은 재정 절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니 일회용 바늘을 씻어서 다시 쓰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의료의 질이 뚝 떨어진다는 얘기다.

이화여대 의대 이선희 교수는 "당장은 돈이 덜 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병이 더 악화돼 환자도 피해를 보고 재정지출도 더 커진다"고 말했다.

◆시대변화에는 둔감=신의료기술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없어 최신 진료방법에 대한 보험처리가 늦어지는 경우가 많다. 끝이 뭉뚝한 젓가락 크기의 침(플런저)으로 뭉친 근육이나 인대를 자극하면 팔.다리가 펴지는 시술이 바로 그런 예다.

국내 의료진이 개발해 지난해 초 보건복지부에 보험허가를 신청했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이 때문에 환자들이 전액 부담해 시술을 받고 있다.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 김동욱 교수는 "미니 이식과 같은 신치료 기술이 제때 인정받지 못하면 국내 의학수준이 외국에 4~5년 이상 뒤지게 된다"고 말했다.

◆불법.저질 진료 강요=현행 건강보험법은 보험이 인정하지 않는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한다. 비용을 인정받지 못한 재료(골수채취 바늘.복강경이나 관절경 수술의 트로카 등)나 약을 환자가 자기 돈으로 쓸 수도 없다.

가령 폐.췌장암 등에만 보험이 되는 젬자를 담도암에 쓰면 불법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효과가 입증돼 있는 진료이지만 한국에선 쇠고랑을 찰 수도 있다.

또 중환자실의 하루 수가는 8만여원으로 1인 병실료(25만8천원)의 3분의1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오히려 중환자실에 첨단 장비.인력 등이 훨씬 많이 들어가는데도 거꾸로 돼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중환자실료가 두 배나 된다. S병원 중환자실장은 "지난해 중환자실에서 8억원의 적자가 났다"면서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 진료가 어떻게 제대로 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제도 손봐야 하지만 돈이 문제=의사의 업무량이나 의료사고 위험, 병원 규모, 투자비용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수가 체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오래 전부터 나오고 있다.

복지부도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건보재정이 2조5천억원의 빚을 지고 있는 마당에 당장 어쩌겠느냐고 항변한다. 대신 복지부는 2006년부터 치료 재료의 가격을 별도로 인정하고 신의료 기술평가 시스템도 만들 방침이다.

의사협회 주수호 이사는 "모든 의료기관이 강제로 건보진료를 하도록 한 규정 때문에 병원들이 평준화된 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며 "건보 취급 여부를 병원이 선택할 경우 서비스의 질을 놓고 경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중앙일보.코레이 공동기획>
신성식.정철근.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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