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7)구인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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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찌기 「구인회」라는 문학 「그룹」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는 독자가 많을 줄 안다.
이 문학 「그룹」은 우리 문단사에 있어서 거의 전무후무하다고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전에도 문학「그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해방후에 이르러 문단의 혼란속에서 많은 문학단체가 나왔지만 우리나라에선 그문학 「그룹」이 그때마다 어떤 외부적인 정치의식같은 것이 개재된 것들이 돼서 어딘지 순수성이 없다고 보여지는데 비하여 이 「구인회」는 퍽 순수한 문학자체의 의미로 집결된 단체였다고 본다.
이 「구인회」는 33년8월에 구성되었다.
처음의 회원 9인의 명단을 열거해 봐도 그 단체가 다른 목적없이 그저 문단우의로 해서 모였다고 할 수 있다. 시인에 정지용 김×림, 소설가에 이×준 이효석 박×원등이고 그밖에 이무영 이종양 유치진 김유영 등이 들어있으나 어디까지나 「9인회」의 주축이 된 것은 처음에 든 5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뒤에가서 일부가 「9인회」를 떠나고 이상등이 추가된 것으로 기억한다.
더구나 그들이 모이게 된 취지같은 것을 보면 별로 규약다운 것도 없고 그저『순수한 연구의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을 목적으로 문인적 모교 「그룹」을 만든다』는 것으로 보아 그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상허는 어느사이에 30년대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어 있었다. 내가 개벽두에 있때 몇번 그와 만난 일이 있다. 그가 이화여전 서무과의 직원으로 있을때다. 「신여생」지에 『구원의 여상』이란 소녀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키가 훨씬 크고 외모는 어딘지 혼혈아같은 이국형의 인상이 춘원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딘지 귀공자다운 데가 있어서 이화여전의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소문이나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문학이 크게 상승한 것은 32년의『석우선생』이후『영월영감』 『돌다리』 『가마귀』 『복덕방』을 거치는 동안 당시의 실향적인 민족의 애수를 간결한 문장으로 다듬어 특이한 작품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작가가 이「구인회」의 중심분자가 된 것이다.
효석도 『돈』 이후 단편소설을 서정시와 같이 생각한 서정주의의 작가였고 박×원은 그때 「갓빠가리」(주발뚜껑을 씌우고 밑을 도려내듯이 이발한 머리)의 「모던·스타일」을「제스처」로 하면서 장단의 문장을 시도하여 기교파로 이름난『소세가 구보씨의 일일』의작가였다.
「구인회」의 시인들도 현대시다운 감각적인 어휘를 처음으로 시도한 정지용과 그와 같은 계열에 속했다고 할 수 있는 금×임등이었다.
이들은 한때 조선일보사 방응모사장의 장학금으로 일본 동경제대로 가서 토거광지라는 영문학자에게「에즈러·파운드」「T·S·엘리어트」를 공부해 가지고 돌아와서 소위 「모더니즘」 시혼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만하면 「구인회」를 만든 주요한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 「구인회」는 실제로 문단사적으로 큰공적은 남기지 못하였다. 불과 수년간이 못가서 유야무야한 중에서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으나 주목해야할 일은 그 30년대의 시대적인 변모같은 것이다. 이런 문학「그룹」이 나올만큼 문단정세가 달라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엔 종래 문단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카프」를 물리치고 제「우리의 시대」 이다』고 크게 도전을 한 뜻이 있다.
현세가 기울고 있는「카프」파의 진영에서 바라볼 때 하루아침에 고금이 바뀌는 한이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카프」파로서는 옛날처럼 반동운운의 강경한 배격을 하지못했다. 임화도 이 「구인회」등을 기교파의 대두라고 하고『문학만을 갖고 행복을 느끼는사람들의 신세가 부럽다』고 은건한 야유의 표현을 하고 있었다.
이 시절의 또하나 순문학운동의 경향을 띠고 나타난 문단의 사건중에서 오일도라는 시인이 주재하여 「시원」이라는 문단동인지를 간행한 일을 꼽을 수 있다. 「시원」에 모인 동인들은 정지용 김영낭 등을 위시하여 허보·이하윤등 전기의 「시문학」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태반이 여기에 집결되어 있었다. 이 시대에 새로 대두하고 있는 시운동, 그중에서도 김영낭을 대표 시인으로 본다면 그의 시에 대한 박용철의 말을 빌때에『그는 유미주의자다. 그는「키츠」의 말「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다」를 신조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때 신흥문단세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알 수 있다. 또한 뒤에 등장한 평론가 김환태는 『여는 예술지상주의자…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 나도 그렇게 자처한다』고 말했는데 앞의 말들과 연결을 해보면 이 시절의 문학이 어떻게 가고 있었는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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