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진흥왕비는 순수비의 선구적 형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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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변태섭교수(서울대) 기고】필자는 지난 1월24일 단국대학 정영호교수에 의하여 새로 발견된 단양의 진흥왕비를 직접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남한강상류를 끼고 단양읍 뒷산 적성산성 위에 서있는 진흥왕비를 보는 순간 필자는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서광을 보는 듯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적성비의 발견은 여러 면으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적성비가 진흥왕순수비의 선구적 형태를 지닌 점이다. 이 비는 그의 건립연대나 내용상으로 보아 뒤에 세워진 순수관경비의 선행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적성비는 지금 남아있는 4개의 진흥왕비보다 건립연대가 앞서고 있다.
4개의 순수비중에서 가장연대가 이른 것이 진흥왕22년(561년) 에 세워진 창령비다. 그러나 이 비는 적어도 그보다 10여년 전에 건립된 것이 확실하다.
적성비가 언제 세워졌는지 그의 건립연대를 가리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기백씨는 진흥왕16년에 북한산을 순행하고 돌아올 때 세운 것이라 하였는데 대하여 임창순씨는 신라가 고구려를 공략하여 죽령이북 고현(강원도 철령) 이남의 10군을 탈취한 진흥왕12년이라고 논한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적성비의 건립은 진흥왕 10년께(549년)로 보아야 옳다고 생각한다.
적성비의 건립연대는 두 측면에서 추적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단양지방이 언제 고구려로부터 신라영토에 편입되었느냐 하는 역사적 상황의 검토이고 또 하나는 적성비에 나오는 인물을 분석함으로써 접근하는 방법이다.
단양지방이 신라에 귀속케 된 것은 전술한 바 신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여 죽령이북의 10군을 빼앗은 진흥왕12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죽령이북」이라는 표현만으로 단양지방이 이때 신라에 편입되었다는 해석에는 의문점이 생긴다.
그것은 청주지방은 훨씬 이전부터 신라령에 속하여 바로 진흥왕 12년3월에는 국왕이 친히 청주(낭성)에 순수하고 국원(충주)에 있던 우륵을 불러 하임궁에서 가야금을 연주케 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충주에 연접되어있는 단양이 이때 진흥왕 12년까지도 고구려세력 밑에 머물러있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것 같다.
다음 적성비에 나오는 인물을 검토하여도 그 건립연대가 진흥왕 12년을 앞서는 것이 증명된다. 이 비에는 국왕의 교시를 받은 고관으로 10명의 이름이 나오고있다. 이들 인물가운데 제일 앞에 나오는 사람이 이간 「이사부」이다. 이 이사부는 진흥왕2년에 병부령(국방장관에 해당)에 임명되고 신라의 정략사업의 주역을 맡았던 유명한 이사부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적성비에 진흥왕대의 원로재상인 이사부의 이름이나오는 것은 이 비가 진흥왕 때 세워졌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적성비 건립의 시기를 보다 좁혀주는 사람이 「무력」이다. 무력은 바로 김유신의 조부다. 이 비문에 아깝게도 그의 관등이 보이지 않지만 아간 비차부 다음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손(아찬=아간·6위)이하임을 알수 있다.
그런데 무력은 진흥왕14년에 아찬으로서 한강하류에 설치된 신주의 군주로 임명되고 있으며, 진흥왕22년에 세워진 창령비에는 발손(잡찬=3위)으로 표기되고 있다. 따라서 무력이 아간 이하의 관등을 가졌던 적성비는 진흥왕14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적성비 건립연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는 바로 무력 앞에 기술된 「비차부」에서 얻을 수 있다. 비차부는 이 비에 아간으로 표기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거칠부전을 보면 진흥왕12년 거칠부가 고구려를 쳐서 죽령이북의 10군을 탈취할 때 비차부는 아찬보다 상위인 대아손(5위)으로서 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적성비가 진흥왕12년 이전 비차부가 아찬의 관위에 있을 때 세워졌음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적성비가 진흥왕12년 이전에 건립되었다면 과연 언제 세워졌을까. 이 비에는 이미 적성부근에 중앙에서 파견된 추문촌 당주(군사상의 부대장) 와 물사벌성 당주가 주둔하고 있음이 나타나 있어 단양지방을 경략한 후임을 알게 한다.
신라가 단양지방을 영유한 것은 진흥왕9년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충주비경)을 칠 때 신라가 출병하여 승리를 거둔 시기가 아닌가 추측되므로 그의 입비는 폭주가 설치된 후인 진흥왕10년(549년)께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적성비는 비차부가 아간 때 건립되었으므로 적어도 그가 대아손이었던 진흥왕12년보다 수년전에 세워졌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와같이 적성비가 4개의 진흥왕순수비보다 앞서 건립되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의 성격도 상통하는 데가 있어 순수비의 선구적 형태임을 표시한다. 이 비문의 해독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으나 대체로 진흥왕이 이사부 등 10명의 고관에게 하교하여 신라척경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하고 가족에게 시혜하는 한편 장차 야이차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은총을 베풀겠다는 약속을 선언한 내용으로 보아 큰 오류가 없을 것 같다. (김석하· 남풍현양 교수의 조언참조)
이것은 뒤의 진흥왕 순수관경비에서 새로 개척한 지방의 『민심을 방채하여』그 노고를 위로하고『충신정성』있는 자에게 포상하겠다고 약속한 취지와 성격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적성비는 새로 척경한 지방의 유공자의 공훈을 새기고 동시에 장차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포상하겠다고 포고한 점에서 순수관경비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 할수 있겠다.
즉 새로 개척한 지방의 백성을 회유하려는 신라척경 정책의 최초의 표현이 이적성비에 나타나 있으며 뒤에 세워진 4개의 진흥왕 순수관경비는 그의 발전된 형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적성비는 국왕의 직접적인 순행비는 아니지만 진흥왕의 교시에 따른 시혜를 기념하고 당시의 원로재상인 이사부의 이름이 나오며 뒤의 순수관경비의 선구적 형태란 점에서 그에 못지 않은 가치가 있는 비이다.
이 비에 의하여 신라가 진흥왕 12년에 고구려에서 빼앗은 「죽령이북 고현이남의 10군」 중에 단양지방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적성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적성인 「야이차」 및 그 가족에 대한 시혜 사실에서 당시의 가족제도와 법제문제가 밝혀지고 적성의 호구(적성연)및 토지제도(전합법) 등 사회경제적 용어가 보임으로써 한국고대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점도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단양적성비의 발견은 금석문발견으로는 해방후 최대의 수확이라 보아 틀림이 없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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