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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토에 국가 시책 알린 기념비|단양 진흥왕비에 대한 학계의 의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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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6일 단양시내 뒷산 적성산성에서 발견된 진흥왕비는 앞으로 학계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그 건립시기와 성격이 아직은 확연치 않고 비문의 자구 해석에도 의견이 엇갈리고있기 때문이다.
24일 10명의 관계학자로 구성된 고증 위원들은 현지를 답사해 검토했으나 다만 신라의 가장 오래되고 귀중한 진흥왕 때의 비석이라는 점만 의견을 굳혔다.
단양의 이 비석이 선명하게 해석되지 않는 것은 총4백50여자(추정)중 상단부의 약1백50자가 결실돼 문맥이 토막토막 끊겼기 때문. 이사부와 김무력 같은 진흥왕대의 주요 군부 인물이 등장돼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것이 틀림없지만 애석하게도 비문 첫머리의 연대가 마멸됐고 김무력의 관등마저 없어졌다.
현존하는 2백83자는「보」(보?)한 글자를 제외하고 모두 오늘의 한자로 읽어냈지만 20여명이나 등장되는 인명 가운데, 특히 당시 주민의 이름이 잘 분간되지 않는다. 또「추문촌」「물사벌성」「나리촌」「비금죽리촌」같은 지명이 단양 인근의 지역일 것인데 다른 역사기록엔 나타나지 않는 이름들이다.
어쨌든 이 비석은 통상의 축성비가 아니고 왕의 교시에 따라 새 영토를 경영하고 시혜하는 내용을 기재한 진흥왕비.
다만 진흥왕 몇 년에 세워졌겠느냐는데 모든 관심의 초점이 집중되고 있다. 국사학자 이기백 교수(서강대)가 진흥왕 16년으로 보는 견해는『왕이 11월에 북한산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경유하는 주군마다 조세 감면과 특사를 베풀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역시 고대사의 직제를 연구하는 변태섭 교수(서울대)는 진흥왕 14년에 김무력을 석주(신주)군주로 삼았는데 단양비엔 그런 직책명이 적혀 있지 않으므로 그 이전에 해당되리라고 추정했다. 오히려 왕이 청주(낭성)를 순수하는 진흥왕 12년이거나 그 이전에 속하리라는 것이 변 교수의 의견. 진흥왕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천안지방에서 서로 공략하는 틈을 타 신라가 2개성을 탈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무렵에 적성을 탈취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금석문에 밝은 임창순씨(문화재위원)는 비문 속에 이독의 흔적이 거의 없고 문체와 서체가 보다 예스러운 점으로 미루어 신라가 단양 땅을 맨 먼저 탈취한 직후가 아니겠느냐는 견해다. 즉 진흥왕 12년 거칠부 등을 보내어 죽령 이북의 고구려 땅 10개군을 뺏았었다는 기록을 주목하고 있다.
비의 건립시기는 이같이 6세기 중엽의 몇년 사이로(550∼555)한결 좁혀지고 있으며 비의 성격에 있어서도 새 영토 확장에 따른 경영(통치 및 포상)방법을 제시한 점으로 보아 국가적인 차원에서 건립됐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물론 북한산 순수비처럼 왕이 와서 순수했다는 사실을 못박아 기재하진 않았으나 진흥왕은 새 영토의 순수를 자주 했을 뿐더러 그런 새 영토에 대한 국가적 시책을 기재한 기념비이기 때문에 아직은 광의의 순수비 성격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학계의 입장은 그것이 순수비든 아니든, 이 분야에선 해방 후 최대의 소득이라고 기뻐하고 있다. 적어도 창령 순수비보다 앞서는 신라 최고의 비석이고 또 많은 새로운 연구과제가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①진흥왕의 새 점령지에 대한 구체적인 경영방식 ②장적과 토지 제도 등의 율령실시 ③「이손」·「아손」등의 관등을「이간」「아간」으로 지칭했던 시기와 그 밑에「지」라는 존칭의 사용문제 ④「대중등」「공형」등 종전 볼 수 없었던 지침의 해석 ⑤단양 적성 인근의 주요 요새에 대한 지명조사 ⑥중국남·북조의 영향이 짙은 예기있는 옛 서체와 ⑦당시 신라어의 한문 표기 방식 연구 등이 그것이다.
또 임창정씨는「고두림」이 이 지역에서 신라에 협조한 고구려 왕족이 아닐까 추정했는데 남풍현 교수(단국대)는『…적성야영차』를 적성의「야이차」라는 인물로 해석, 곧 야이차가 이 비석의 주인공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을 제기했다.
이번 단양 진흥왕비의 발견에 정영호 박사와 더불어 참여했던 차문섭 박사(단국대)는 이 비문이『왕교사…』이후의 문장과『절교사…』『별교…』의 세 토막으로 구분되는 점을 주목하고, 3차에 걸친 왕의 교시에 의해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나왔다.
24일 단국대가 구성, 현지를 답사한 조사단은 이기백·변태섭·임창순·남풍현·차문섭·정영호 교수와 황수영(동국대) 김원룡(서울대) 김철준(〃) 김석하(단국대)교수 등 10명이다.
단국대는 오는 4월께 이 지역의 발굴을 벌일 예정이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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