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이민 75년 "이젠 미국인 부럽지 않다"|생존 1세 교포 4명이 말하는 「어제와 오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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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03년1월13일 한국최초의 이민선 「켈릭」호가 「하와이」사탕수수밭 노동자 1백1명을 「호눌룰루」 항구에 내려 놓은지 만75년이 지났다. 대부분의 교포1세는 이미 작고, 현재1백살 전후의 생존교포는 다섯손가락을 꼽을 정도. 1세 교포 4명을 찾아 초기 이민의 참담했던 개척생활과 근황을 알아봤다.
【호놀룰루=정관현 특파원】
『사진 박지마. 귀신 같을걸….』- 겹주름살의 김샛별할머니는 「카메라」를 마다한다. 28만여 미주교포가운데 최고령인 김할머니는 올해 1백3살. 몸은 늙었지만 아직도 또렷한 발음과 기억력은 젊은이 못지않다.
김할머니가 「하와이」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구한말의 수민원(綏民院=이민알선기관)이 페쇄되기 직전에 이민선을 탔다. 3살난 맏아들(김경진씨·76·현재 할머니와 함께 양로원에서 살고 있다)을 업고 한발 앞서간 남편을 찾아 나섰던 것. 이때부터 고달프고 긴 이민생활은 시작됐다.
남편이 일하는 「카우아이」사탕수수밭 집단수용소에서 다른 노무자들의 빨래와 밥짓기를 맡아 겨우 3∼4시간 잠자며 일했다. 수입은 하루 고작 50「센트」.
『내가 고생한 것을 어찌 다 말로 하겠어.』- 반문하는 할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남편과 슬하의 6남매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이민생활은 차차 안정됐지만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은 더해간다. 대부분의 교포1세가 그렇듯이 스스로 일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난 노인들은 양로원으로 들어간다.
자녀는 이미 미국인이 돼 있고 부모들도 미국식을 따를 수밖엔 없다. 김할머니의 여섯 자녀들은 모두 착실한 생활기반을 닦았지만 아무도 어머니를 직접 모시려하지 않았다.
고작 자녀들이 양로원을 찾아와 말벗을 해주고 필요한 것을 줄뿐이다. 『내가 돈을 벌지못하니 양로원에서 살수밖에 없잖으냐』는 할머니의 말속에는 1세 교포들의 노후생활의 한 단면이 투영돼 있는 듯 했다.
올해로 꼭 1백살을 맞은 지덕수할아버지도 양로원에서 살고 있다. 지할아버지는 평생에 결혼을 한번도 안한 늙은 총각(?).
구한말 병정이었던 그는 장관을 혼내주고 내뺀다는 것이 태평양을 건너게 됐다.
첫 이민선 「켈릭」호에서 내려 「모골리아」 사탕수수 밭으로 들어갔지만 병정출신의 그에게는 하는 일이 도대체 시시했다. 농장을 뛰쳐나와 손댄 것이 소장사. 한때는 초기 이민 가운데 제일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났을 만큼 재미를 봤지만 워낙 통이 컸던지 지금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 헐헐단신.
번돈으로 어려운 동포들을 도와주고 독립단체에 기부금도 내고 흥청흥청 써버렸다. 그래도 배짱하나만은 두둑해서 『양로원생활이 「호텔」에서 지내는 것같다』고.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까닭에 대해서는 『그저 혼자 사는게 제일 편해』라고 했다.
고덕화씨(99)와 김공도씨(89)부부는 1세 교포 가운데 비교적 복되게 여생을 살고 있다.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고씨는 24살 때인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경주(耕主)동맹의 고용인으로 계약되어 이민선을 탔다. 일행 48명과 배치된 「와이키키」농장의 미국인 주인은 다행히도 인심이 후해 먹을 것, 입을 것을 남보다 잘해 주었다.
그러나 일이 고되기는 마찬가지여서 햇볕에 탄 피부에선 진물이 흘렀고 손바닥엔 못이 박혔다. 더러는 견디다못해 귀국하거나 본토로 떠나기도 했지만 고씨는 끝장을 보겠다는 집념으로 묵묵히 일했다. 2년만에 십장(감독)의 지위에 오르면서 지내기도 수월해졌다.
고씨는 1913년 2월 당시 유행했던 「사진혼인」으로 부인을 맞았다. 「호놀룰루」 부두에서 사진보다 훨씬 어여쁜 16세짜리 신부를 맞은 고씨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고씨부부는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틈틈이 재봉기술을 익혀 양장점을 차려 많은 돈을 벌었다. 「파오아」가 1천평이 넘는 대지에 큰집을 마련했고 슬하의 4형제도 모두 훌륭히 키워냈다. 맏아들 고영위씨(62)는 「매킨리」고교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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