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캄보디아」의 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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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베트남」과 「캄보디아」두 공산국 사이의 무력충돌은 전「인도차이나」의 연방국가화를 꿈꿔온 「하노이」의 또 하나의 야망을 표현하고 있다.
이 충돌은 또한 「아시아」를 무대로 한 중·소 대립의 최초의 전쟁적 투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번 사태가 만약 「하노이」의 승리로 돌아간다면 통일된 공산 「인도차이나」는 중공· 「아세안」·인도양을 위협하는 동「아시아」 유수의 일대세력권으로 부상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력권은 「아시아」에 대한 「크렘린」의 팽창정책과 연결될 경우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인도양 군사전략도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월맹지도층의 유력한 실력자중의 한사람인 「보·구엔·지압」은 이미 오래 전에 『통일된 「인도차이나」 연방공화국』의 대 야심을 암시해 보인 적이 있으며, 호지명 역시 좁은 의미의 「베트남」보다는 넓은 의미의 「인도차이나」를 단위로 생각하고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반세기에 걸쳤던 공산혁명의 마지막 실천과제가 전인지반도의 통일에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일찍부터 예견되었던 것이다.
「베트남」민족과 전통적인 적대관계에 있어왔던 북경이 「하노이」의 대미전쟁 지원에 소련보다 소극적이었던 까닭은 바로 그 점에 있었으며, 소련이 「하노이」지원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던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하노이」 주도하의 통일된 「인도차이나」야말로 중공에 대해 가장 강력한 견제세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공은 이렇게 될 가능성을 미리부터 우려했음인지, 「노로도·시아누크」가 「크메르·루지」와 손을 잡고 반「론·놀」 통일전선을 펐을 때 재빠르게 지원의 손을 뻗쳤다.
「베트남」과 역사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여있는 「캄보디아」지역에 친중공파를 확고하게 부식해 놓는 것이 「하노이」의 대세력화를 견제하는 최적의 포석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까닭이었다.
때마침 「크메르·루지」는 소련의 「론·놀」 승인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혁명노선도 모택동 사상에 따른 농촌 「코뮌」을 「모델」로 삼고있어 「하노이」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점이 많던 터였다.
이러한 대립상은 「하노이」와 「크메르·루지」가 전인지반도를 석권하고 난 이후에 있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양성화하기 시작했다.
월맹의 「레·두안」이 북경의 반소노선에 등을 돌리고, 「모스크바」와 밀착하는 사이「크메르·루지」의 「폴·포트」는 북경과 평양을 내왕하면서 「하노이」에 대한 독자성을 과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의 무력충돌은 그와 같은 모든 잠재적 분쟁요소가 일시에 폭발한 사건으로, 단순한 양국간 국경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소의 무기지원을 수반시키는 복합적 국제분쟁으로 비화할 소지마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번 사태를 주시하는 가운데 우리는 몇 개의 중요한 중간결론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는 중·소 대립이 같은 공산권 내부에서도 본격열전의 형태로 하청될 수 있다는 한가지 실증이다.
둘째는 「앙골라」내란·인도-「파키스탄」전쟁, 그리고 이번 사태처럼 소련은 반소파가 약세에 놓여 있다고 판단할 경우엔 언제라도 친소파의 전격침공에 의한 현장변경을 지지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끝으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소련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도 그런 「변경」도식을 원용하려고 북괴를 충동하지는 않겠느냐는 의혹이다.
인지반도의 새 전란에 임하는 소련 팽창주의와 북괴의 기회주의의 행동양식을 예의 분석해야할 이유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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