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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창 안 되고 합창만 된다는 보훈처 … 유족 없는 5·18 기념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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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또다시 ‘반쪽 행사’로 치러졌다. 18일 광주광역시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4회 기념식은 5·18 유가족과 관련 단체 및 기념재단 등이 불참한 채 진행됐다. 지난해에도 유족 대표 등 일부가 불참하긴 했지만 모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광주를 방문 중인 김한길·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등 야당 인사들도 참석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은 빠지고 정홍원 국무총리, 박승춘 보훈처장, 서남수 교육부 장관 등 정부 측 인사들만 가득한 광경이 연출됐다.

 갈등의 핵심은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는 5·18 때 희생된 두 야학교사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이듬해 만들어졌다. 재야운동가 백기완씨가 가사를 썼다. 이때부터 5·18 기념식의 공식 노래로 불렸으며 1997년 정부 기념식으로 바뀐 뒤에도 참석자들이 모두가 따라 부르는 제창이 공식 행사에 포함돼 왔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공식 식순에서 빠지면서 논란이 됐다. 2011년부터는 제창도 폐지되고 합창단의 기념공연에 포함되면서 갈등이 커졌다.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의 행사 ‘보이콧’도 늘어났다. 갈등이 커지자 국회는 지난해 6월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곡에 지정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보훈처는 제창을 허용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근거로 드는 게 안전행정부의 의전 편람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18일 “의전 편람에 따르면 5대 국경일(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의 기념곡은 제창하되 이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기념일의 기념곡은 제창 혹은 합창으로 하도록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5·18은 ‘나머지’ 국가기념일에 해당한다. 제창이나 합창 중 선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왜 합창으로 정해졌을까.

 이에 대해 보훈처는 ‘관례’라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5대 국경일을 제외한 기념일 행사를 조사해보니 ‘현충일 노래’처럼 기념곡의 제목이 기념일과 같으면 제창을 했고, 그렇지 않으면 합창을 해왔다”며 “같은 이유로 6·10 민중항쟁의 기념곡인 ‘광야에서’도 제창이 아닌 합창을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목에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합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합창은 보훈처가 의뢰한 대행업체가 나서 구성한 200여 명의 합창단이 불렀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손학규 전 대표는 이날 “공식 행사에 시민들이 제창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하겠다니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보훈처의 결정이 관료 중심 사고이며 행정편의적 발상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편람에도 제창이 허용되어 있는데 관례를 이유로 금지한다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다”며 “게다가 이 관례가 이 같은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감당해야 할 만한 것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비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재윤 의원도 “지난해 여야 의원 158명이 나서 기념곡 지정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낸 만큼 정부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며 “사회 갈등을 수습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갈등을 만드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기념곡으로 공식 지정되지 않은 데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보훈처는 이에 대해 “국가기념일에 불리는 노래 중 국가가 나서 지정한 것은 없다. 그에 대한 현행법 자체가 없으며 현재 법 제정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유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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