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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독한 터주대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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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명동에는 책방이 한 군데 뿐』이라는 이야기를 갖고 상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엄격히 말해 「성바오로 서원」까지 두군데지만 순수한 「책방」이라는 이름으로는 「문예서림」 하나뿐인 것이다.

<5억 줘도 "안 판다">
그것도 평당 1천만원을 호가하는 명동 입구, 「코스모스」 백화점 건너편 양품점의 화려한 「쇼·윈도」 사이에서 무려 32년간 한자리를 지켜 왔다는데에 남다른 이야기와 화제를 담아온 것.
24평의 금싸라기 땅에서 은행 금리도 나오지 않는 책장사를 자랑스럽게 지키고 있는 주인 김희봉씨 (62).
김씨는 지금도 상오 10시 책방에 나와 손님을 맞고 있으나 당뇨병으로 하오 2시에 퇴근한다.
그래도 『하루라도 빠지면 몸이 더 불편하다』는 그가 책방에 나오는 것은 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미련」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김씨는 가끔 20, 30년 전의 단골 학생들이 지금은 아버지가 되어 자녀를 데리고 책을 사러 올 때 이 곳을 지켜온 보람을 느낀다.
해방 직후 한글책 「붐」으로 책이 불티나게 팔리자 이 거리에도 30개 가까운 책방이 들어섰으나 10년 이상 견딘 책방은 하나도 없으며, 도중에 가끔 생겨 났다가도 대부분이 오래가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김씨는 『이것이 바로 유행에 민감한 명동의 참모습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물론 지금은 이 거리에서 책방이 어울리지 않지요. 하나 나마저 그만 둔다면 명동은 암동이 될 것 아니오.』 모윤숙·조지훈·장만영의 화려했던 「문예시대」를 안아왔던 김씨는 이제 「명동을 지킨다」는 말을 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김씨의 책가게에 눈독을 들인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땅을 팔라고 졸랐고 최근에는 모 투자 금융 회사가 시가의 2배인 5억원을 주겠다고 유혹해도 김씨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성한 아들까지도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으나 『내가 땅속에 묻힐 때까지는 어림도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명동이 가진 매력 때문에, 그리고 명동을 지켜왔다는 미련 때문에 30년 이상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명동 사람」이라고 부르는 명동의 「상징」들이다. 학생·문인들이 즐겨 찾던 약속 장소 제과점 「케익·파라」의 홍종명씨, 명동 최초의 양화점을 차렸던 「달러」 골목의 자현여관 여주인 민양근씨, 「미즈」 백화점 주인이자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 양의 아버지 정준채씨를 비롯, 박기옥씨 (제일상회), 한충석씨 (전 명동 동장), 이상호씨 (톰보이·스토어) 등…현재 이렇게 손꼽히는 터주대감만 20여명. 명동 「패션」의 화려한 선구자 「노라노」씨도 「송옥」과 함께 20여년 명동을 지키고 있다.

<한때 「제2경무대」>
「노라노」씨는 6·25 이후 미국에서 「디자이너」 수업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문인·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한 소위 「명동 문화인」들과 함께 화려한 이야기들을 뿌려 왔었다. 국내 최초로 조선「호텔」에서 열린 「패션·쇼」에서는 극작가 이진섭씨가 사회를 보고 시인 김수영씨 등 「베레」모와 「바바리·코트」를 흩날리던 숱한 예술가들이 참석했을 정도였다.
8개의 「테이블」, 발 밑에서 올라오는 선풍기 바람으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다방의 「마담」 조춘형씨도 20년 가까이 명동을 수놓고 있는 사람.
12평의 좁은 공간, 음악은 물론 실내 장식도 거의 없는 이 다방은 보기와는 달리 자유당 시절엔 이기붕·최인규·장경근씨 등 정계 거물들이 자주 드나들어 「제2의 경무대」란 소리도 들었다.
이기붕씨는 자기 때문에 손님들이 이 다방을 꺼려 할까봐 입구 옆 구석자리에 앉아 손님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배려해 주기까지 했다는 것.
『다방에 나와 예술과 정치를 이야기하던 멋은 이제 완전히 가셨어요. 그저 만날 약속, 긴급한 얘기를 하는 곳이지요.』 E여대 출신 조씨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바깥 세계와는 아랑곳없이 천직의 고집을 지키는 「명동 사람」도 있다. 해방 후 30여년간 해마다 변덕을 쌓는 명동의 「패션·모드」를 가위 하나로 지켜온 사람 한동석씨 (「한」양장점 재단사). 『죽는 날까지 가위질을 그만둘 수 없다』고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양장점 2층 공장에서 재단을 하고 있다.
명동을 가위질하는 쟁쟁한 재단사들이 대부분 한씨의 밑에서 일을 배웠고 온갖 멋쟁이들을 옷 입혀 왔지만 그는 아직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일을 할뿐이다.
『명동 20년』의 작가 이봉구씨와 「탤런트」 최불암씨의 어머니 이명숙씨가 경영했던 「은성」 역시 명동의 흘러간 추억거리 중 빼놓을 수 없는 주역들.
이봉구씨가 은성의 한 모퉁이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던 모습은 주위의 문인들이 『은성의 풍경화』라고 까지 했다. 그는 명동을 끔찍이도 사랑했기에 자칭 「명동 시장」이었으나 5년전 뇌일혈로 쓰러진 이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우정은 사무로 전락>
은성도 4년 전 문을 닫자 그곳에 걸려 있던 「사인·북」과 이씨의 『명동 20년』만이 「보히미언」들이 밤새워 애환을 노래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 문인들에게 잊지 못할 또 한 사람, 「동방 싸롱」주인 김동근씨도 가버린지 오래다.
가장 번화한 거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오가는 거리에서 명동 토박이들은 외롭다. 「문예서림」의 김씨는 『하나 남은 이 책방마저 밀러나게 되겠지요』라면서 씁쓰레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명동은 『사랑이 「섹스」로, 우정이 사무로, 인간이 돈과 권력으로, 예술은 「매스컴」으로 바뀌었다』는 흘러간 명동인 조병화 시인의 탄식처럼 「정제」라는 이야기, 「예술」이라는 낭만이 20여명 살아 있는 「고집」속에서만 타다 남은 촛불처럼 깜박이고 있을 뿐이다. <김정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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