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선씨의 도미 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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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른바 대미 「로비·스캔들」의 주동 인물로 지목된 박동선씨가 특정 조건하에서라면 미국에 가 법정에서 증언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의 도미로 한미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사건」이 완전히 해결될는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적어도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선 박씨의 도미 증언을 놓고 벌어졌던 한미간의 절차 문제에 대한 이견이 이로써 해소되는 것이다. 또 마치 한국 측이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나 하는 듯이 의심해오던 미국내의 의혹도 상당히 해소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따라서 본난이 이미 촉구한 바도 있듯이, 박씨가 스스로의 의사로 도미를 결심하게 됐다면 이는 지극히 다행스런 일이다.
자국민을 다른 나라에 강제 인도할 수 없다는 우리측과 「로비·스캔들」의 법적 마무리를 위해 박씨의 증언이 꼭 필요하다는 미국의 입장은 「딜레머」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박씨의 자신의 의사에 의한 도미는 이 「딜레머」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그의 도미가 어려웠던 것은 여러 장애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자가 미국에 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물론 기본적인 문제였으나, 그러한 생각을 하게끔 주변 사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 연방대 배심이 무려 36가지 항목으로 성급히 기소를 해놓았으니 설혹 미국에 돌아가려는 생각이 있었던들 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미국 정부가 기소 취하의 뜻을 밝혔다는 최근의 정세야말로 그가 도미할 의향을 갖게한 전제라 아니할 수 없다.
박씨가 도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사건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면 한미 양국의 우호관계를 위해서는 그가 자의로 도미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러니 그가 이번에 도미 용의를 표명한 김에 그 결심이 실행될 수 있도록 해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려면 한미 양국 정부는 최근 진행 중인 협의를 통해 그가 신변에 심한 위협을 느끼지 않고, 도미를 실행할 수 있도록 완벽한 조건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도미가 비록 박씨의 자의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의 미국행은 남보기에는 한국이 미국의 압력에 굽혔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그러한 요구가 실현되는 외양을 지니기 때문이다.
한미 관계에 대해 이러한 오해를 받는 것은 우리측은 물론 미국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이렇게 불필요한 오해를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도 박씨의 도미 조건은 우선 한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것이어야 함은 물론, 객관적으로도 납득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지 않아선 안 된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깊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동안 이 사건을 다루는 과정에서 우리측 정세 판단에 상당한 「갭」이 있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확인되었듯이 결국 따질만큼 따지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는 미국인들의 기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나 할까.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겠지 하는 다분히 동양적 낙관으로 사태에 대처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없지 않다.
대미 「로비」 활동이 문제된 것 자체가 한미간의 문화적 「갭」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었는데 해결 과정에서마저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아무튼 한미 우호와 한국 안보에 득이 되지 못하는 박동선 사건은 하루라도 해결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루 속히 이 불쾌한 사건의 악몽에서 벗어날 기틀이 마련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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