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가 만난 사람] 양자 협상선 개도국 소외 … 다자로 가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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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21면

호베르투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은 일대일 무역협상에선 신흥국이 소외된다고 강조했다. [뉴시스]

지난해 5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조용한 전쟁이 벌어졌다. 세계무역기구(WTO) 차기 사무총장 자리를 두고 브라질과 멕시코가 맞붙었다. 남미 출신이 처음 WTO 수장에 오르는 기회였던 만큼 두 나라로선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멕시코는 에르미니오 블랑코(63) 전 멕시코 통상장관을 후보로 내세웠다. 블랑코는 세계 무역 협상 분야에서 이미 유명 인사였다. 멕시코·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 일본·니카라과·볼리비아와 교역 협상을 주도해 타결로 이끈 화려한 이력을 자랑했다.

호베르투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

브라질이 내놓은 후보는 WTO 주재 브라질대사 호베르투 아제베두(56). 브라질 외교부 차관을 역임하긴 했지만 국제 외교가에선 신인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로이터통신은 “모든 협상 당사자의 얘기를 잘 듣는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조정하며 해결책을 도출해 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란 주변 평을 전했다. 결과는 ‘노련한 종결자’ 블랑코를 상대로 한 ‘조용한 조정자’ 아제베두의 승리였다.

WTO 회원국이 아제베두의 손을 들어 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도하개발어젠다(DDA). WTO의 오랜 숙제다. 카타르 도하에서 2001년 11월 WTO 각료회의에서 출발한 다자(多者)무역 협상을 말한다. 분야는 공산품과 농산물, 서비스 전반을 아우른다. 상대국 역시 WTO 회원국 전부로 광범위하다. 사공도 많고 가야 할 산도 많았다.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신경전은 치열했고 10년 넘게 진척이 없었다. 타결은 아직 먼 얘기다. 합의를 통한 한 걸음 진전이 중요했다.

‘조용한 조정자’ 아제베두의 역량은 여기서 빛을 발했다. 지난해 12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서 10가지 합의(발리 패키지)를 이뤄 냈다. 도하개발어젠다란 두꺼운 책의 첫 장을 넘겼을 뿐이지만 WTO로선 처음 돌파구를 연 셈이다. 취임 8개월째를 맞은 아제베두 WTO 사무총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16일 그를 직접 만났다. 세계경제연구원(이사장 사공일) 주관으로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조찬간담회를 막 끝낸 참이었다.

-다자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FTA로 대표되는 국가 간 일대일 양자(兩者) 무역협상이 더 활발한데.
“FTA는 나라와 나라 간 국경을 중심에 둔 협상이다. 관세나 할당량을 주로 다룬다. 이와 달리 WTO 같은 다자무역 협상은 국경을 초월한다. 반덤핑·세이프가드·반독점 같은 문제까지 다자협상을 통해 해결 가능하다. 무엇보다 양자나 지역별 협상에만 집중하면 경제 규모가 작은 신흥개발도상국이 소외될 수 있다.”

-도하개발어젠다는 여전히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발리 패키지 다음 단계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WTO 회원국이 159개다. 그 숫자만큼의 다른 이해가 얽혀 있다. 협상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한국의 도움과 역할이 중요하다. 이번에 방한한 이유 중 하나다.”

-도하개발어젠다 협상을 풀어낼 묘안은 있나.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잘못된 시기에 적절치 않은 사람에 의해 다뤄진다면 실패로 가고 만다. 협상은 요리와 같다. 재료를 순서에 맞게 프라이팬에 제때 넣어야 좋은 음식이 나온다. 협상은 과정이고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막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WTO 내에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당연히 그렇다. 자유무역으로 산업화를 이뤄 낸 한국은 신흥국의 귀감이다. 동시에 선진국과도 양자협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췄다. 선진국과 신흥국의 중간에서 양쪽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기에 적임이다.”

-원화 값이 지나치게 올라 한국 경제에 부담이 되고 있다. 수출국 간에 경쟁적으로 통화가치를 낮추려는 움직임이 있다.
“각국 경제 기초체력에 따라 환율이 유연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최근 ‘특정 통화’(위안화를 의미)가 다른 무역 상대국 통화에 비해 저평가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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