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4)바둑에 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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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바른 전문기사가 되려면 역시 제도적으로 잘 되어있는 일본기원에서 수업을 쌓아야 된다는 것이 우리 젊은 청소년기사들의 꿈이었다.
한국사람으로 제일 먼저 일본기원에서 공부한 사람은 필자인데 바둑유학을 간다는 것이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김인4단(당시)이 도일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환송기념으로 민국일보가 주최한 필자와의 3번기까지 두었으나 수속관계로 지연되어 해를 넘졌으며, 제6기 「국수」전에 금4단이 도건하게 되었다. 금4단의 도일은 확정적인데 만일 그가 새 국수가 된다면 「국수」위가 어떻게 되나 하는것이 기계의 숙제이기도했었다.
당시의 5번승부는 덤이 없었다. 제1국은 빅이 되었고 다음에는 필자가 2승하고 김4단이1승했었다. 이래서 제5국까지 갔었는데 제5국에서 김4단이 이기면 동률이 된다. 그렇케 되면도전5번승부는 부득이 제6국을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으나 제5국에서 필자가 이겨 5번기로 끝난 것은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이「국수」전을 마치고 김4단은 62년3월9일 강도에 올랐다.
어느 문하생으로 정한 것도 아니며 인척이 되는 마미암씨를 찾아간다는 것이었다. 만일을 위해 김4단에게 『동경에 가 뜻대로안되거든 이걸 가지고 「기마니」(목곡실) 9단을 찾아보시오』하고 펀지 한통을 써주었다. 그 내용인즉, 김4단의 충중한 기재를 소개했고 되도록이면 문하생으로 보살펴 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일븐땅에 도착한 김4단은 어리둥절했겠지만 그보다도 마씨란 분은 바둑을 전혀 모르는 분이어서 더욱 난처했던 모양이다. 마씨의 이웃에 사는 「고스기」 (소삼정) 라는 4단과 면접시켜 강의해 보았다. 그는 자기아들과 한판 두게 하더니 일본기원 원생으로 넣어주겠다는 대답이어서 마씨는 실망에 젖었었다. 그때서야 김4단은 필자의 편지를 내보였다는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내놓울 일이지, 그 소중한 소개장을 뒤늦게야내놓으니 환장할 지경이었다』고 마씨는 당시를 회상했었다.
그래서 의기양양해진 마씨는 부랴부랴 김4단과 함께 「기따니」9단을 방문했다.
편지를 소상하게 읽고나서「기마니」9단은 오히려 구면을 대한듯 반가와했고 그때부터 사제의 정을 맺었다.
이래서 「기따니」9단은 적극적으로 김4단을 밀어 결국 5월6일 「우지사와」(등택명재) 9단과의 시험기에 합격하여 일약 3단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시험기의 내용은 두점으로 두되 김4단이 이기면 3단, 지면 초단, 비기면 2단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바둑에 이겨 3단이된 것이지만, 이와 같은 예는 오청원9단이 도일하여 일약 3단을 인정받은 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기원의 젊은기사들간에는 불평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즉 자기네들은 『10세 전후부터 10년 가까이 피나는 원생수업을 거쳐 겨우 따내는 것이 초단인데 더우기 외국인에게 그런 파격적인 대우틀 하다니 말도 안된다』는 것이 반논의 요지였다는 것. 이것을 무마시키는 데는 첫째 「기마니」9단과 그 문하생일동이 앞장섰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시험기의 상대자였던 붕재9단과 그의 숙부인「후지사와」(등택수항)9단이 당시에도 젊은 기사들의「보스」이었는데 이분들이 『외국인이니까 그런 대우를 해줘야 한다. 우리는 바둑을 전세계에 보급해야 할 사명을 따고있기에 더욱 그러하다』고 설득시켰다는 후일담이다.
3단자격을 얻은 김4단은 승단시합은 물론 각중 「타이틀」전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올려 한때 「김·죽·림」 (한국의 김인, 일본의 대죽영웅, 중국의 임해봉)시대가 올 것이라는 「팬」들의 기대가 자못 컸었다.
그러나 도일한지 1년9개월만인 63년11월25일 홀연히 귀국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애석한 일이었다. 귀국한 원인은 확실치 않으나 병역을 치러야 한다는 것, 도장에서의 단체생활이 고역이었다는 것과, 한편으로는 이런정도라면 한국에서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등이 뒤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바둑을 공부하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이지만 시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공부가 더욱 중요한 것인데 수가 높은 일본기사들을 상대로 함이 얻는 바가 컸을 것이다. 그만큼 바둑은 상대적인 것이니까. 그러므로 하다못해 2, 3년이라도 더 공부했더라면 오늘날의 그는 또 다른 김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해방후 일본기원에서 바둑유학을 한 제1호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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