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준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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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람이 우물을 팔 때에는 여기저기 물구멍을 파는 경우가 많다. 특히 참을성이 없을 때 그렇다.
한치만 더 파도 물이 나올지도 모르는 것을 물기가 없다하여 중도에 파던 구멍을 버리고 새 구멍을 판다. 그게 또 시원찮으면 곧 자리를 옮긴다.
그런가하면 외곬으로 한 구멍만 파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만약에 온 정력을 다 쏟고 한 구멍만 파내려 가다 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남이야 뭐라던 물이 나올 때까지 파내려 가겠다며 그는 한 구멍에만 집착한다. 정말로 우직하다고 남의 눈에는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굳은 신념이 있는 것이다. 꼭 물이 나올 것이라는, 그리고 또 사실은 그도 남몰래 여기저기 밑 조사를 철저히 하고 난 다음의 결심이 숨어있는 것이다. 결국 물이 안 나올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신념으로 용재 백낙준 박사가 연세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27년 여름이었다.
그 때에는 연전의 창립자 「언더우드」1세는 이미 작고한 다음으로 「에비슨」박사가 임시로 교장자리에 있었다.
『한국 신 교사』로 「예일」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백낙준씨가 제일 처음으로 맡아 가르친 것은 성경이었다.
1년 후에 문과과장자리에 오르자 그는 몇 가지 엉뚱한 일을 벌였다. 하나는 비록 과외과목이지만 조선어를 가르치도록 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국사를 처음으로 정식과목 속에 넣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지 50년. 그는 연세대와 함께 살아 나갔다. 꼭 두 번 바깥출입을 한 일이 있다.
한번은 해방직후 서울대학을 접수하는 작업을 맡았을 때였다.
또 한번은 6·25가 나기 한달 전에 문교부장관이 되었을 때였다. 이때에는 30개월 동안 학교를 비웠었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그는 줄곧 연세대를 지키고 키우는 일에만 생애를 바쳤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직스러워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외곬으로 한 우물만을 파내려 가는 끈기와 자신과 겸허함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는 동안에 연세대는 날로 새로워지고, 그는 늙어갔다.
가을이 익어 가는 교정을 명예총장실 창 밖으로 내다보며 용재는 과연 지금 뭣을 생각하고있을까.
그가 판 우물에서는 지금 맑은 샘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물이.
이끼가 곱게 낀 거암처럼 그는 오늘을 보며 또 내일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뚜렷한 방향을 정해놓고 살아가야 한다』-이렇게 그는 조용히 학생들을 타이른다. 더 많은 교훈을 앞으로 더 오래 남겨 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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